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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서아인 Mar 10. 2021

삶이 미지 #2






Neuilly-sur-Seine



이미지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이미 그 그어진 선은 점점이 사라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쉽게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경계에 어떤 엄격한 속성을 어떻게 들일 수 있을까.



이 그림 속에는 검은색이 극도로 많이 튀는군, 이 그림은 틀렸어,


이 그림에는 흰색이 환하게 많이 쓰였으니 이 그림이야말로 옳은 그림이야.



그림 속의 색은 단지 그것의 다른 속성이 드러난 질료일 뿐, 그것의 옳고 그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려야 정답이지.'


'너의 그림은 색과 선이 실제와 너무 달라 그러니 틀렸어.'



이미지의 세계에서 이런 얘기는 통용되지 않는다.


이미지는 단지 형태와 색채의 조합일 뿐, 그것을 무엇으로 바라보고 느끼고 판단하는 자의 잣대는


실제 이미지와 관련이 없으니.



이미지는 그저 보여질 뿐이다.



그어 저버린 선은 이내 여러 가지 감정들을 만들어낸다.


결핍, 분노, 의심, 우울.


그것을 경험하기 위한 그 선은 어느덧 너무 차곡차곡 쌓여 그 선안에 나를 집어넣고 꺼내 주질 않는다.


그 선은 그 감정을 경험하기 위한 형태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었던 거야.


그 경험이 충분했다면 이제 그 선을 다시 점점이 분리하고 지워내,


또 다른 형태를 경험하기 위해 그 선을 들어내.



내가 원한 그 감정을 경험하기 위해 내가 그었던 그 선들이 빠져나갈 여백 하나 없이 단단한 형태를 만들어내,


그 형태에 틀어박힌 나는 그것을 해체시킬 수 없을 때가 있다.



단지 내가 그은 그 선을 하나 들어 올려, 여백을 만들면 돼.


그러면 그 형태가 사라지고 와해돼.


그 형태가 점점이 경계를 풀고 사라지면 그 감정도 같이 녹아들어.



그러니 그 선을 하나 들어.



너라고, 그은 그 선을 들어서, 다시 처음처럼 나로 바라봐.



그러면 네가 빠져있는 그 감정들이 녹아서, 그 형태를 사라지게 마법을 부릴 거야.



내가 그은 선인 줄도 모르고, 가볍게 그어졌던 그 선은 반복적인 감정들의 중독으로 더욱더 진하게 그어져만 간다.


그렇게 그것이 너무 진해져서 그 형태가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형태 속에 박혀버렸다.



그 형태 속에 칠해진 그 색 속에서 허우적대며 그 물감색 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그 선들은 출구 없이 꽉 막혀서 나는 점점 더


그 색을 입고 그 색 속에 빠져버린다.



그 형태에 둘러싸인 색에서 나오는 유일한 길은 내가 그은 선을 스스로 다시 들어 올리는 것뿐.



‘나'가 아닌 ‘너'라고 그어버린 그 선으로 다른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



너에서 나.



선 하나 들어 올려 옮겼을 뿐인데, 빠져있던 그 색이 녹아 또 다른 색으로 변해간다.



또 다른 나라는 색으로.









Erik Satie museum






2018_05_22


Neuilly-sur-Seine, Fro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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