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 누구의 예외도 없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우리 모두는 크리에이터이다.
늘 매 순간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맴도는 소리가 있다.
바로 생각,
그것은 마치 소리처럼, 문장처럼, 대사처럼 들리지만,
그것들의 더 원초적인 형태는 이미지이다.
잠들기 직전, 의식이 깊어지면서 생각의 흐름이 들리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변화한다.
내가 듣고 있던, 하고 있던 그 생각들이, 단편적인 소리로, 머릿속 재잘거림으로 전해지다가
그것이 그 속성을 달리한다.
그것이 마치 살아있는 듯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그림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그 시각적 파편들은 더 선명해지고 더 날카로워지고
그것은 눈을 뜨고 보는 이 세상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그것들은 이내 부드러운 파스텔 그림에서 사진처럼 선명해지다가 동영상처럼 내 안에서 영화처럼 상영된다.
생각이 이미지로 전환되고, 그것의 선명도가 명료해지면서 그것은 마치 스크린 속 영상처럼
보이는데, 내 몸이 잠에 들어 그 의식을 잃고 그 영상 속으로 의식을 넘겨줄 때,
이제 보이는 그 이미지, 영상을 몸이 느끼는 오감처럼 경험하기 시작한다.
잠들어 버린 몸은 이제 그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자격을 그 영상 속 내게 전달해준다.
몸이 내게 이렇게 속삭이며 그 주도권을 넘겨준다.
"나는 잠들어 있을게, 하지만 내가 느끼는 감각은 여전히 느낄 수 있어.
네가 늘 하는 그 생각들을 머릿속 재잘거림으로만 느끼지 말고,
내 오감으로 느껴봐, 훨씬 더 생생하니까."
생각의 재잘거림의 그 모습을 흐릿한 이미지로 내게 보여주더니,
그 이미지는 이내 사진처럼 선명해지고, 동영상처럼 생생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울트라 HD 화면 보다 더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채로 보여주다가,
이제 그 속의 나무를 만질 수도 있고, 달콤한 초콜릿을 맛볼 수도 있고,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부드러움까지 느끼게 한다.
나는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은 이미지이고, 나는 그 이미지를 그린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오감으로 경험한다.
잠들지 않은 순간 역시 우리는 늘 생각의 재잘 거림 속에 살아간다.
미술관에서 눈은 로스코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지만,
그 색채에 매료된 첫 순간이 지나면, 지루함을 느낄 새 없이 내 생각은 여전히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림 다 보고 뭘 할까, 어디로 갈까, 그 날 그 사람이 알려준 그 책 제목이 뭐였더라?'
눈은 그림을 향해있지만, 수다쟁이 생각은 끊임없이 자기의 그림을 보아달라고 말한다.
마치 소리처럼 들리지만, 생각은 여전히 움직이는 이미지로 내게 보여 지고 있는 중이다.
그것을 인지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해도 그것이 이미지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로스코의 그림을 눈으로 보고 있지만, 내 머릿속 생각 상영관에서 돌아가는 생각의 이미지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우리는 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생각이라는 그림을,
삶의 매 순간인 시공간을,
늘 그리고 그리고 그 그림이 되고, 그 그림을 오감으로 느끼고 인지한다.
그리고 또 그다음 삶의 순간을 그린다.
그것이 되기 위해서, 그 전체가 혹은 그 부분이, 다시 그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2019_04_25
Neuilly-sur-Seine, Fr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