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미지 #1
안녕하세요.
이번에 소개해드릴 작품은 바로크 시대, 벨기에의 작가 야콥 요르단스의 작품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이 작품의 제목은
Le roI boit ou le triage de la fève de l'Epiphanie입니다.
한국어 제목이 정해진 게 없어서, 번역을 하자면 술 마시는 왕/ 주현절, 왕인형 뽑기라고 소개해드릴게요.
이 작품 원제 속에 Epiphanie/에피파니라는 주현절이 등장을 해요.
오늘 에피파니 같은 순간을 느껴서 에피파니에 대해 이 작품을 통해서 이야기해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혹시 삶을 살아가는 동안, 갑자기 세상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고요하게 모든 게 다 깨어있는 듯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맑은 순간들, 느끼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늘 그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기에 그 순간이 참 특별하더라고요.
누군가는 자주, 누군가는 아주 가끔 모두가 다르게 느낄 것 같기도 하고, 모두에게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겠지만, 그런 순간들을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 현존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어제 집의 뒷산의 대나무 숲길에서, 그리고 빛의 물결이 흐르는 나뭇잎을 바라보다가, 그러한 비슷한 느낌의 빛나는 고요함을 느꼈어요.
제게 그 순간은 마치, 맑은 피아노 소리가 한 음만 울려 퍼지는 것 같기도, 혹은 물방울 하나가 물의 표면에 닿을 때 파동으로 퍼지는 그런 느낌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다시, 에피파니에 대해서 숙고하기 시작했죠.
이 에피파니는 주현절이라는 의미로도 사용이 되는데요.
주현절은 예수가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난 날이고, 프랑스에서는 이 날을 에피파니라고 부르는데요.
이 날 프랑스 사람들은 <la galette des roi: 라 걀레뜨 드 후아> 즉, 왕의 걀레뜨를 먹습니다.
왕의 걀레뜨는 아몬드 크림을 넣고 구운 패스츄리 케이크인데요.
1월 6일이면 프랑스의 모든 빵집과 슈퍼에서 이 걀레뜨를 판매해요.
슈퍼에서 파는 것도 전문 빵 가게 못지않게 아몬드크림이 촉촉하니 맛있어요.
이 걀레뜨에 사람 명수대로 조각을 내고 서로 조각을 골라 먹다 보면 누군가의 조각 안에서
왕을 상징하는 인형이나 왕관이 나오는데요.
그것을 이번 작품 원제에 나오는 'fève/페브/왕 인형'이라고 합니다.
그 왕의 인형이 빵에서 발견하는 사람은 그 날의 왕이 되어 케이크 살 때 함께 주는 금색 왕관을 쓰게 되어요.
프랑스에서는 이렇게 새해마다 1월 6일 이 걀레뜨 빵을 먹으며 주현절 즉 에피파니 날을 보내는데요.
저도 한번 운 좋게 걀레뜨 빵을 먹다가 왕관을 발견해 그 날의 왕이 되어보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이 에피파니는 기독교적인 범주가 아닌 다른 의미로도 해석이 되는데요.
불교적 해석으로는 '개안하다. 즉, 눈을 뜨다.'라는 의미로도 쓰이기도 합니다.
'해탈하다, 영적으로 각성하다, 혹은 깨어나다'라는 의미가 될 텐데요.
그러니, 사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현, 혹은 영적으로 각성하는 불교적인 의미의 순간은
사실 말이나 형태로서 드러난 표현만 다를 뿐 정말 유사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죠.
영적 수행을 하는 구루들 사이에서는 예수를 비유적 차원으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 의식이 우리 내면에서 발현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내 안의 부처가 발현되는 깨달음과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커다란 바닷속 하나의 물방울인 개인적인 '나, 에고, 퍼서널리티'의 작은 나라는 개체성에게, 커다란 바다인 예수 즉 그리스도 의식이 발현한 것 혹은 순간적 깨달음으로 견성을 했다는 의미이고,
이 고요한 순간 캔버스 속 하나의 주인공으로 존재하던 내가 잠깐 그 에고 물방울이 커다란 바다와 하나가 된 순간인 것이에요.
다른 표현으로 얘기해보자면요.
영화 속 ' A'라는 배우가 빵 먹는 소녀 역할이 되기 이전의 진짜 나 자신 배우 'A'가 되거나 그 영화의 감독이 되어버린 그 순간을 표현하는 것이니까요.
이 그림은 이렇게 에피파니의 기독교적 의미와 불교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림 속 인물들은 에피파니를 맞이해, 모두가 즐겁게 걀레뜨 빵 안에서 누가 왕인형을 뽑는지 즐기며 술도 마시며 주현절의 분위기를 내고 있는데요.
참, 매력적 이게도, 모두가 캔버스 속, 그러니까 영화 속 배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연기에 한참 빠져 있을 때, 주인공 소녀만큼은 아주 놀랍게도 작품의 감상자인 우리를 쳐다보고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아요.
"난 지금 잠시 동안 제가 이 캔버스 속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아요.
난 지금 이 영화의 한 장면 속, 에피파니 즉 주현절을 맞아 이들과 함께 빵을 먹는 소녀 역을 연기하고 있잖아요.
그래요. 난 그렇게 내 삶인 캔버스에 푹 빠져 있어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들이 이 그림을 쳐다보고 나와 눈 마주친 것도 알고 있어요.
난 지금은 이 곳의 배역으로만 존재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한 이 세상 전체이고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이기도, 그리고 또한 이 그림을 바라보는 당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가끔 우리에게는 이렇게 이 삶 속의 배역의 충실함에서 잠깐 깨어나는 그런 순간들이 있어요.
무언가에 정신이 빠져 있다가도, 기분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도, 모든 생각들이 다 사라지면서 ' 여기가 어디지? 내가 누구지?' 묘하게 이 순간에 녹아들어 있는 그런 반짝이는 순간들을 경험하기도 해요.
마치, 내 영혼이 내게 속삭이는 것처럼요.
"지금, 너 네 역할 속에서 삶을 잘 살아가고 있어.
그렇게 걀레뜨 빵을 먹고 즐겁게 이 세상을 즐겨.
그렇지만, 가끔 이렇게 기억해, 네가 누구인지"
넌 이 그림 속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이기도 하잖아.
그러니 네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렴."
화가인 야콥 요르단스는 에피파니의 날, 걀레뜨의 빵을 먹으며 그 날을 표현하면서도, 이 세상을 비밀을 알아버린 것처럼 깨어난 소녀가,
"나 지금 에피파니의 순간이에요."라는 걸 표현한 것 같아요.
저렇게 시선을 똑바로 관람객에게 던지는 소녀가 눈빛으로 얘기해요.
"난 알고 있어요. 당신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당신은 알고 있나요?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요."
그것을 우리는, 우주, 관찰자, 초의식, 내면 등 다양한 표현으로 이야기하잖아요.
그것이 무엇으로 불리던지 그것의 사랑으로 우리가 존재한다고도 하는데요.
이 소녀가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내면과 눈 마주쳐보아요.
그리고 맑은 새소리가 온몸에 울려 퍼지는 것처럼 투명해진 그 순간을 또 즐겨보아요.
걀레뜨 빵을 먹는 것도 즐겁지만, 그 청명한 에피파니의 순간을 느끼는 것도
이 삶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순간일 테니까요.
여러분은 삶의 어느 순간에 에피파니를 느끼시나요?
그림 속 소녀에게 살짝 얘기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