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프랑스 파리는 음악이 흐르고 노천카페가 즐비한 낭만적인 모습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방문한 파리 북동부에 위치한 19구는 빽빽한 차들과 회색빛 건물이 늘어선 삭막한 지역이었다. 이 길 끝에 대중과 예술, 자연 이 세 가지를 연결하는 문화 공간, 빌레뜨 공원(Parc de la Villette)이 나타날지 의구심을 품고 빌레뜨가 적혀 있는 표지판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가능한 한 다양한 문화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접할 수 있도록 한다는 빌레뜨의 목표를 생각하니 파리의 중심이 아닌 외곽 지역에 위치한 것이 꽤나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빌레뜨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양 쪽으로 펼쳐진 화사한 풀밭을 보고 바로 빌레뜨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북쪽 입구가 남쪽에 비해 삭막한 환경이라는 것은 빌레뜨를 한 바퀴 다 돌아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빌레뜨 공원은 무려 55헥타르에 이르는 커다란 공원으로 전시장, 공연장 등의 시설을 갖춘 문화공간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다. 빌레뜨 공원은 19세기말 도축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후 여러 번의 개축과 확장을 거쳐 현재의 복합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다. 빌레뜨를 대표하는 건물인 그랑홀(Grande halle)과 과학 기술에 대한 지식을 대중화하기 위해 1986년 세워진 시떼 데 시앙스 에 드 랭뒤스트리(Cité des sciences et de l'industrie)를 중심으로 하여 빌레뜨 극장, 대형 공연장, 파리 음악학교 등의 건물들이 공원을 이루고 있다. 빌레뜨 공원이 여느 다른 문화 공간과 차별화되는 점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도축장을 개조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음악, 연극, 미술 등의 예술 분야뿐 아니라 사회과학 분야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컨텐츠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 모든 것이 자연을 존중하고 공존하는 사회를 위한 건강한 가치를 토대로 한다는 것이다.
빌레뜨 프로젝트, 도시 속 문화 공원의 새로운 모델
공원의 남쪽 입구에 들어서면 넓은 광장 끝에 서있는 커다란 건물이 제일 먼저 방문객의 시선을 끈다. 낮은 높이에 비해 가로로 썩 널찍한 공간이 꽤나 인상 깊었는데, 이 건물이 바로 빌레뜨 하면 빠질 수 없는 그랑홀이다. 2005년 재건축 후 역사문화재로 지정된 그랑홀은 빌레뜨를 대표하는 상징적, 역사적 건물로 현재 다양한 문화 행사와 전시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그랑홀은 1865년 도축장 겸 축산시장을 위해 지어져 그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큰 축산시장으로 193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화의 흐름에 밀려 도축장은 결국 문을 닫게 되었고, 이 커다란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파리시의 문제가 되었다. 결국 도축장의 일부를 개조해 문화공간으로 만들자는 여론에 따라 파리시는 도축장을 북동부 지역 시민들을 위한 공공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과학기술 박물관, 문화 공연장, 지역 공원의 세 가지 주요 분야를 통합한다는 목표와 함께 빌레뜨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파리시는 곧 국제 규모의 공모전을 열었고, 37개국 472명의 지원자 중 베르나르 추미(Bernard Tschumi)의 프로젝트가 선정되었다. 그의 프로젝트는 빨간색 작은 건축물로 표현되는 점, 산책로와 갤러리로 표현되는 선, 그리고 잔디밭으로 표현되는 면의 조화를 주요 컨셉으로 했다. 그래서 빌레뜨 공원은 남과 북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산책로를 만들고, 사이사이 자연이 어우러져 하나의 공원을 이루는 조화로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 후로도 다양한 건축가들의 손길이 거쳐 지금의 자연과 사람, 문화가 공존하는 빌레뜨 공원이 완성되었다.
빌레뜨 공원 방문이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헤매지 않고 곧잘 길을 찾을 수 있었는데 아마 재능 있는 건축가들의 노력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빌레뜨를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가는데 거의 1시간가량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는 내 걸음이 느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걷는 내내 사방에서 볼거리가 가득해 발길을 자주 멈춘 탓도 있을 것이다. 조금 걷다 보면 나타나는 공원에서 한참 자연을 만끽하고, 또 조금 후에 나오는 재미있는 구조물들에 눈을 떼지 못하고, 다리 위를 건너며 산책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발길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 것이 빌레뜨에는 12개의 공원, 26개의 폴리라 불리는 작은 건축물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폴리라는 것이 재미있는데 정자보다는 제법 건물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건물이라 말하기에는 또 그 규모가 너무 작은 애매한 건축물이었다. 휴게소나 공원에서 보는 간이 건물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베르나르 추미가 처음 빌레뜨를 기획할 때 점의 요소를 위해 사용한 것이 바로 이 빨간 폴리들이라고 한다. 공원 사방에 퍼져있는 폴리는 전부 새빨간 색으로 칠해져 있어 초록빛 정원 사이에서 하나의 점으로서 미적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용 구조물이 익살스럽게 놓여있는 용의 공원, 물결 모양으로 굽이치는 바닥에 바람개비들이 세워져 있는 바람과 사구의 공원 등 각각 재치 있는 테마로 이루어진 공원은 보는 이를 즐겁게 했다. 이 외에도 빌레뜨 공원에는 각각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스무 여개의 건물들이 있어 많은 파리 시민들이 찾아왔다.
가능한 한 다양한 문화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빌레뜨 북쪽 입구에 있는 시떼 데 시앙스 에 드 랭뒤스트리(이하 시떼) 앞에서 프로그램을 살피던 중 한 여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 컨퍼런스를 들으러 가기로 했는데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녀와 함께 걸으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소 심리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마침 정신건강에 대한 컨퍼런스가 있어 왔다며 주로 컨퍼런스를 듣기 위해 빌레뜨를 찾는다고 했다. 그리고 공원이 넓으니 천천히 즐기라는 말을 하고는 급히 컨퍼런스 장으로 들어갔다. 컨퍼런스가 진행된 시떼에는 과학과 예술의 만남을 주제로 한 전시부터 사회과학 관련 컨퍼런스 등의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뿐 아니라 과학산업단지라는 말에 걸맞게 도서관, 영화관, 아쿠아리움, 플라네타리움 등의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시떼의 훌륭한 시설도 인상 깊었지만, 그보다 문화와 함께 대중의 삶으로 자연스레 스며드는 시떼의 프로그램이 더욱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다. 신체, 물, 텔레비전, 공장 등으로 나뉜 프로그램은 아이들이 각각의 주제와 관련한 체험을 통해 과학적 지식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배울 수 있도록 했다. 과학이 문화와 만나 얼마나 흥미로워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시떼를 포함하여 빌레뜨 안에 있는 스무 여개의 건물들은 각각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운영된다. 현대음악 보급을 위해 16,000여 개에 이르는 악보를 보관하고 또 그 악보의 연주까지 들을 수 있는 상트르 드 도큐망타시옹(Centre de documentation), 현대 서커스를 지원하는 에스빠스 샤삐또(Espace chapiteaux), 프랑스어 문화권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연극 관련 레지던스 프로그램과 세미나, 공연을 진행하는 홀 드 라 샹송(Halle de la chanson), 힙합댄스 창작 프로그램 등 현대 무용가들을 위한 홀 오 뀌흐(Halle aux cuirs), 대중과 영화 관계자들의 만남을 주로 하여 무료로 영화를 상영하는 페니슈 영화관(Péniche cinéma), 청소년들의 안무, 연극 창작활동을 위한 수업 및 아뜰리에를 진행하는 파리빌레뜨 극장(Théâtre Paris-Villette), 대중음악과 락음악 공연을 위한 제니쓰 공연장(Zénith) 등의 시설이 있다. 이처럼 각각의 목적은 분명 다르지만 모두 창작 지원과 문화의 대중화 그리고 그 다양성 존중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쯤 되니 빌레뜨 공원은 공원보다는 복합문화공간이라 불리는 편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막상 빌레뜨 안에 들어가면 공원을 거닐다 우연히 만나는 영화관 혹은 전시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화생활을 목표로 오지 않았더라도 산책을 하며 자연스럽게 문화를 만나게 되는 것이 빌레뜨가 말하는 문화 대중화의 진면목이 아닌가 싶었다. 빌레뜨는 대중과 예술 간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학교 및 사회단체와 파트너십을 맺고 다양한 문화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장애인을 위한 안내 서비스와 전용 시설도 마련되어 있어 빌레뜨의 섬세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빌레뜨는 문화와 함께 사람을 존중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서 더 나아가 빌레뜨는 자연을 존중하는 가치도 가지고 있다. 상점들이 빽빽한 여느 복합문화공간과는 다른 편안하고 활기찬 분위기도 이러한 가치에서부터 나오는 빌레뜨 '공원'만이 가질 수 있는 강점이 아닌가 싶다.
모두를 존중하는 가치
빌레뜨 공원을 산책하며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자연이었다. 곳곳에 펼쳐진 파릇파릇한 꽃과 풀, 나무는 보는 이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빌레뜨에서는 다양한 테마의 공원만큼이나 다채로운 식물들이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식물에 대한 전문지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내가 그 다양성을 알아본 것이 우연은 아니었다. 공원의 식물들을 보고 있으면 종종 그 옆에 놓인 안내판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이 안내판이 다양한 식물에 대해 소개해준 것이다. 식물의 이름과 함께 세밀화, 원산지 그리고 QR코드까지 준비되어 있는 매우 친절한 안내판이었다. 과연 빌레뜨는 자연을 이용하는 공원이 아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공원이었다.
자연에 대해 책임감이 있는 공원이 되기 위한 빌레뜨의 노력은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고, 2010년 본격적으로 생물다양성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현재 빌레뜨에는 주로 다년생, 지역에 알맞은 식물 종으로 이루어진 약 10,000 제곱미터에 이르는 녹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물론 사용되는 살충제의 양도 매우 제한적으로, 최대한 환경을 존중하는 방법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빌레뜨의 공원 중 문을 닫아 들어가지 못한 공원이 있었다. 바로 '지나가는 정원'이라는 뜻의 쟈당 파싸제(Jardins passager)이다. 공원이 닫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울타리로 둘러싸인 이곳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덕분에 풀 숲 깊숙이에 비밀스레 위치한 이 공원은 한 층 더 신비로워 보였다. 알고 보니 쟈당 파싸제는 친환경과 관련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공원 겸 교육 현장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유럽 유기농 인증기관인 에코써트(Eco-cert)가 인증한 친환경 자연 공간이기도 했다. 그 안에는 황무지, 늪 등 다양한 환경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때문에 더욱 호기심이 일었지만 굳게 닫힌 문 때문에 키보다 훨씬 높은 나무울타리 틈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빌레뜨의 환경 보호는 이뿐만이 아니다. 빌레뜨는 2009년부터 에너지 절약을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을 시작했다. 현재 그랑홀은 내부의 공기를 순환시키는 방법의 난방 시스템을 사용하여 에너지 소비량을 약 20퍼센트가량 낮추었다. 또한 모든 전등을 LED로 교체해 조명에 사용되는 에너지가 반으로 줄었다. 현재 재건축되고 있는 건물들 역시 친환경 건물로 거듭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빈 틈 없는 빌레뜨의 준비성에 그 미래가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은근슬쩍 파리의 시민들에게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니 벌써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온지라 나는 그제야 그랑홀을 볼 수 있었다. 그랑홀은 이미 문을 닫았지만 그 앞 광장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 아이와 산책을 나온 사람, 삼삼오오 모여 깔깔대며 이야기 꽃을 피우는 어린 학생들까지, 많은 이들이 빌레뜨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랑홀 옆에 잘 꾸며진 정원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사람들은 짚으로 만든 정자 밑에서, 간이 테이블에서, 혹은 나무토막에 걸터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간단한 차와 음료를 판매하는 카페였다. 순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티파티에 초대되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당장 친구를 불러 한 자리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리고 곧이어 빌레뜨의 카페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되어야지 라는 왠지 모를 뿌듯함과 함께 카페, 아니 정원을 나왔다.
도축장으로 지어질 때부터 프로젝트 공모전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이 되기까지 빌레뜨는 항상 파리 시민들의 삶 바로 옆에 있었다. 그리고 경제, 사회, 환경, 문화 등 전 영역에 걸쳐 위기를 맞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예술과 문화의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빌레뜨가 파리 시민들에게 질문을 건네는 방법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것이 문화를 통해 사회를 바꾸어나가는 빌레뜨의 진가가 아닌가 싶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https://cjculture.org)의 해외통신원 활동을 위해 2016년에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