얹힌 것처럼 내내 남아있는 책들이 있다. 소화가 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의 후기와 서평을 찾아 읽어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편함이 가시지 않는다. 소화가 쉽지 않다. 책을 통한 성찰과 사유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모비딕]으로 유명한 작가 허먼 멜빌의 중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는 매우 불편한 인물이 나온다. 주인공 바틀비는 면벽 묵언수행급, 하는 말이라곤 한 마디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가 전부다.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된 필경사인 그는 어느 날부터 일손을 놓는다. 항상 거기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문제는 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일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것. 변호사는 그를 어르고 달래고 연민하다가 분통을 터뜨린다. 좀 합리적으로 되라고 애원하지만 “송장처럼 창백한” 바틀비는 미동도 않고 입을 뗀다.
“현재로선 좀 합리적으로 안 되고 싶습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바틀비가 답답하고 불안하다. 제 발로 사무실에 들어갔으면 일은 해야 하지 않나, 안 할 거면 왜 안 하는지 적어도 이유는 말해야 하지 않나,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나 싶은데 그 모든 걸 안 하고 ‘끝’까지 버틴다. 그런 행동에 대한 속 시원한 해명 없이 소설은 장탄식으로 끝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소설을 처음 읽을 때는 화자인 변호사에 이입하며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악덕 상사와 달리 변호사는 젠틀하고 점잖다. 바틀비의 사정도 잘 헤아려주고 연민도 있다. 그러니 그를 곤혹스럽게 하는 바틀비가 당황스럽다. 변호사가 안돼 보이기까지 한다.
바틀비 이전에 먼저 있었던 필경사는 두 명인데 그저 '터키'와 '니퍼즈'로만 불린다. '터키(Turkey)'는 붉은 칠면조를 뜻하는 말이다. 터키가 터키로 불린 이유는 점심시간 이후 그의 얼굴색 때문이다. 터키는 오전 시간에는 '쉽게 넘볼 수 없는 방식으로 대단한 양'의 일을 완수하지만 에너지가 소진된 오후 시간이 되면 업무 역량이 현저히 저하되었다. 변호사 입장에서 보면 해고의 사유였지만 '헌신적인 오전 근무'를 감안해서 '그가 남아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니퍼즈(Nippers)는 '족집게'를 뜻하는 말인데 그의 거친 야망을 에둘러 이야기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니퍼즈는 20대 청년으로 뛰어난 재능이 있긴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심해서 늘 소화불량을 달고 다녔다. 그럼에도 깔끔하고 재빠르게 필사하는 능력이 있어 터키와 마찬가지로 변호사 사무실의 터줏대감이 된다.
변호사의 입장에서 보다가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터키의 빨간 얼굴과 니퍼즈의 소화불량이다. 그 둘의 사이 어딘가에 내 모습이 보인다. 보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바라볼 때는 불편하고 거북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그들이 소설 속에서 바틀비를 따돌리고 당장 내쫓아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나도 묘한 동질감과 안전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동시에 매우 불편하다.
그 이후에야 바틀비가 보인다. 그는 처음부터 침착하고 조용하다. 격렬하게 저항하지도 무례하지도 않다. 그저 추가 업무에 대해 "I would prefer not to."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말할 뿐이다. 그는 평온하고 침착하다. 당황하지 않는다. 당황스러운 쪽은 상대일 뿐이다.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는 말이 당황스러운 것은 '규칙'이나 '합리'라는 불리는 관례 속에서 '하지 않는 것을 prefer'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 때문이 아닐까.
나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어디쯤에 있고 싶을까.
합리성으로만 포획되지 않는 삶, 그리고 "하지 않음을 선택할 수 있는 삶"도 있음은 다시 겸허해지게 만든다.
이 책에서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다"라고 번역한 "I would prefer not to"는 일상에서 많이 쓰이거나 작품 속에서 바틀비가 이 말을 하는 상황에서 예측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말을 반복한다.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게 아니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를 부정한다기보다, 그 행위가 기정 사실화된 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을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즉 '하지 않음'의 가능성과 이에 대한 선택, 이 두 가지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에는 '부정'의 선택 그리고 '선택'할 권리의 주장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겼다고 볼 수 있다.
- 옮긴이의 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