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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Dec 28. 2023

진실의 조각을 이어 붙이기

크리에이티브 VaQi 《섬 이야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제1회 연극포럼 수상작으로, <<연극포럼>> 2023년호에 수록된 원고입니다.
본고는 크리에이티브 VaQi의 《섬 이야기》를 비평의 대상으로 한다. 해당 작품은 2022년 10월 20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초연했으며, 필자는 2023년 4월 13일부터 16일까지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에서 진행된 재연(再演)을 바탕으로 본고를 작성했음을 밝힌다.


들어가며

    박물관에서 고대의 유물을 볼 때면 때때로 경이를 느낀다. 땅속에 묻힌 아주 자그마한 조각들로부터 유물의 온전한 모습을 빚어내고, 다시 그것으로부터 수천 년 전의 생활상을 그려낸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고고학자들의 상상력에 감탄한다. 그렇게 그들은 인류가 지나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채워간다.

    누군가는 이것이 허무맹랑한 공상이라 여길지 모른다. 고작 몇 개의 조각으로부터 역사가 서술된다는 것이 탐탁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의 상상력이 역사로 공인될 수 있는 것은 그 ‘조각’이라는 엄연한 물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물리적 증거를 통해 고고학적 상상력은 역사가 된다.

    고고학은 과거의 인간과 현대의 우리를 초시간적, 초공간적으로 연결한다. 그리고 역사가 기억하지 않았던 세계를 가시화시킨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삶이 인류의 역사에 한 부분으로 자리 잡는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1]. 이렇듯 고고학적 상상력은 누군가의 삶을 역사로 전환시키는 마법 같은 힘을 가진다.

    크리에이티브 VaQi는 《섬 이야기》를 통해 제주4·3사건의 역사를 복원한다. 일반적으로 고고학은 수백, 수천 년 전의 역사를 탐구하지만, 이들은 100년이 채 되지 않은 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고고학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특히나 고고학이 지층에 자연적으로 ‘묻혀버린’ 것들을 탐색한다면, 《섬 이야기》는 권력이 ‘묻어버린’ 것들을 탐색한다. 그 세월은 훨씬 짧지만, 자연적 현상이 아닌 인위적 은폐 시도에 의한 것인 만큼 어쩌면 더 깊숙이 묻혀있고 그것을 복원하기 위해 때로는 고대문명을 발굴할 때보다 훨씬 강력한 고고학적 상상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렇게 권력과 폭력이라는 지층 속에 갇혀버린 그날의 진실을 지상의 무대 위로 발굴해낸다.


연극적 상상력을 통해 복원되는 진실

    제주 공항 활주로 아래에서 수백구의 유해가 발견된다. 이것을 계기로 대규모 발굴 작업이 시작되고, 이것이 70여 년 전 벌어졌던 4.3사건 희생자들의 유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묻혀있던 유해가 올라오자, 권력이 유해와 함께 땅속에 은폐했던 학살의 흔적들도 함께 드러난다. 권력은 수천 년의 시간이 만들어 낸 지층만큼 깊숙한 곳으로 진실을 은폐했다. 매장 풍습은 동족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진화적으로 형성된 것이라지만, 권력은 잔혹한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매장을 선택했다. 하지만 은폐를 위한 권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지층은 마치 유물을 보존하듯 그날의 진실을 굳건히 지켜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 앞에 그 진실이 드러난다.

    《섬 이야기》는 발굴의 과정을 고스란히 무대 위에 재현한다. 테이프로 발굴지와 동일한 영역을 표시하고, 그 한 가운데에 위치한 모래 상자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유골을 발굴한다. 증언이 하나하나 더해질 때마다 머리와 팔, 다리와 골반에 이르는 유골의 조각들이 드러난다. 모든 유골이 발굴되고, 마침내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하여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 비록 실제 유골은 아니지만, 파편들이 모여 한 명의 사람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은 진실의 조각을 이어 붙여 더 큰 역사적 진실을 마주하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관객들은 그렇게 고고학적 증거들이 모여 누군가의 삶이 역사의 한 부분으로 기록되는 과정을 바라본다.

    때때로 배우들은 자신의 신체를 통해 스스로 증거가 되기도 한다. 무대 위에 재현된 발굴지가 집단학살의 현장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의 유골 곁에 배우들은 얽히고설킨 채 위치한다. 부감(俯瞰)으로 모래상자를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영상은 마치 70여 년 전 그날의 참상을 떠오르게 한다. 소품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유골일 뿐이지만, 배우들의 신체가 더해지며 그곳은 여러 구의 시신이 매장된 학살의 현장으로 변모한다. 그저 무대 위 모래 상자였을 뿐이었던 공간에 그렇게 그날의 기억이 복원된다. 극장 안에 재현된 공간이 단순히 발굴 현장을 모방한 공간으로 느끼게 하는 것을 넘어, 이곳에 묻힌 이들이 살아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관객들이 자각할 수 있도록 만든다.

    제주도에 존재하는 발굴의 현장이 서울의 극장에서 재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연극적 상상력의 힘이다. 연극적 상상력을 통해 텅 빈 극장 바닥에 붙여진 테이프와 모래 상자, 그 안에 담긴 유골과 그 주변에 놓인 테이블들만으로 발굴의 현장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연극적 상상력의 힘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관객들이 연극적 상상력을 통해 극장에서 발굴 현장을 떠올렸다면, 한발 더 나아가 발굴 현장으로부터 70여 년 전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연극적 상상력의 힘이다. 권력에 의해 은폐되어 단편적이고 추상적인 기억의 조각들만이 남겨진 상황에서 창작자와 관객들은 마치 고고학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고고학자처럼 연극적 상상력을 통해 그날의 진실을 복원해 낸다.

    무대 위에서 이어 붙여지는 진실의 조각들이 비단 연극적 상상력 속에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학살의 실재하는 증거”도 무대 위에서 함께 이어 붙여진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죽인 쇳덩이”, 학살에 사용된 총알의 탄환이다. 발굴책임자의 허가를 받아 공연의 소품으로 사용된 탄환은 진실의 조각을 이어붙이는 《섬 이야기》의 여정에 힘을 더한다. 탄환은 그렇게 엄연한 물증으로써 무대 위에 존재한다. 그렇게 연극적 상상력을 통해 복원된 진실은 “학살의 실재하는 증거”와 함께 희미하지만, 분명한 역사의 한 부분으로 점차 자리를 잡아간다.

  

증언(자)의 딜레마를 넘어

    그러나, 단순히 조각들을 병렬적으로 연결하는 것만으로 진실이 복원되지는 않는다. 깨진 도자기 조각들을 이어 붙이는 과정에서 아교가 필요하듯, 진실의 조각들을 연결하는 것에도 접착제가 필요한 법이다. 고고학에서는 이러한 접착제를 “고고학적 상상력”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이 상상력은 발굴하는 사람만의 개인적인 생각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조각들을 둘러싼 수많은 증거들과 역사적 사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맥락들이 존재한다. 이것이 고고학자의 끊임없는 탐구와 만났을 때 비로소 ‘고고학적 상상력’이라는 아교를 통해 진실의 조각들이 이어붙여지는 것이다.

    《섬 이야기》에서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아교의 역할을 수행한다. 창작자들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날의 기억을 재구성한다. 발굴 현장에서 나온 유골들과 탄환, 그 밖의 조각들을 연결할 고고학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몇 명의 희생자”라는 말로 수치화되었던 이들의 서사는 개개인의 삶을 기억하며 더욱 생생하게 복원된다. 진실의 조각을 이어 붙여 그날의 진실을 향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이다.

    진실을 향한 여정을 보여주기 위해, 《섬 이야기》는 증언자들에게 점층적으로 가까워지는 방식을 선택한다. 극의 초반부, 배우는 증언자들의 증언을 받아적은 녹취록을 낭독한다. 한 편에서는 증언자의 증언을 녹음한 음성파일을 배우가 이어폰을 통해 들으며, 증언자의 방언과 말투, 반언어적 표현을 모방한다. 문자언어라는 수단을 거치면서 정제되었던 증언에 생동감이 더해진다. 그리고 극의 후반부에서는 배우의 개입없이 증언자들의 음성이 극장을 가득 채운다. 제주방언을 설명하는 자막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증언자의 증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문자에서 연기로, 연기에서 실제 음성으로 변화하며 증언자의 실제 증언과의 유사성을 높여가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조각들이 연결되며 진실이 원형(原形)의 모습을 되찾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경험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증언의 과정에서 증언자는 언제나 딜레마와 마주한다. 증언이 가능한 것은 어디까지나 생존자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학살과 같이 해당 사건의 결정적인 본질이 누군가의 ‘죽음’이라고 했을 때, 누군가는 죽은 자만이 그 진실을 아는 것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즉, 죽은 자는 증언의 능력이 없고, 살아남은 자는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한 당사자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조르주 아감벤은 여기서 발생하는 증언의 균열을 피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딜레마를 표현하고 감수하는 것마저도 증언자들이 증언의 과정에서 가져가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2].

    《섬 이야기》는 4·3사건의 본질을 확장하며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한다. 학살과 죽음에만 초점을 맞춰온 과거의 시각을 넘어 그날 이후 지속된 공포와 고문, 억압적 시선까지도 4·3의 본질로 받아들인다. 특히, 4·3으로 인해 ‘죽거나 숨거나 도망친’ 남성들의 이야기에 더해 그날 이후 공포를 견디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여성 혹은 (지금은 노인이 되어버린 당시의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렇게 죽음이라는 본질 앞에 당사자성을 의심받던 증언자들은 당사자성을 획득하고, 딜레마로 인한 당사자성의 분열이 봉합된다. 그렇게, 진실의 조각들은 점차 하나로 이어붙여진다.

    게다가 이와 같은 딜레마의 극복은 남성 중심적 서사로만 기술되었던 역사가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존재들의 다양성을 회복하며 그 본질에 가까워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혹은 어리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던 증언들이 역사의 기록에 한 부분이 된다. 특히 “한 명의 증인은 증인이 아니다(Tetis unus, tetis nullus)”라는 로마의 법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증언이라는 행위는 다른 증거들과 비교해 항상 신뢰성에 대한 의심을 받아왔고 가능한 더 많은 증인을 확보하는 것이 증언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과정으로 평가받았다[3]. 즉, 다양성의 회복을 통한 증인의 확대는 기억과 증언에 대한 신뢰성을 확보하는 결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 날의 기억에 대한 목소리에 더 많은 힘이 실리는 것이다.


듣는 자의 책임과 역할

    진실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섬 이야기》의 창작자들은 기억을 듣는 청자(聽者)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증언자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것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극장 안에서는 마치 창작자들이 그러했듯 관객들이 청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공연이 끝나고 난 후에, 관객들은 자신이 창작자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자에서 그 기억을 전하는 전달자가 된다. 《섬 이야기》를 통해 증언자-청자-전달자라는 역할이 순환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청자의 역할이 단순히 수동적 듣기에 멈추는 것은 아니다. 청자에게도 나름의 역할이 필요하다. 4·3과 같이 국가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듣는 과정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피해자들의 기억은 파편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하기를 억압당해왔고, “말할 수 없음과 듣는 자에 대한 의심, 그리고 설명할 언어의 부족으로 인해 항상 문제적이다”. 자녀조차도 자신들의 기억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스스로의 증언을 더 강력하게 검열한다. 너무 오랜 침묵으로 인해 말과 기억이 망가져버리는 것이다[4].

    그렇다고 해서 망가져버린 말과 기억의 적극적인 조력자를 자처하는 것 또한 위험할 수 있다. 증언이 반복될수록 선별되고 정제된 기억만이 고착화되어, 남은 증언자들이 점차 정형화된 기억을 갖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짜 기억 대신, 청자 혹은 전달자에 의해 재구성된 기억, 혹은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기억이나 자료들을 재발화(再發話)하는 행위만 반복하게 될 여지가 있다. “그것을 들여다볼 자아 자체를 상실”해버린 이들에 대한 과도한 개입은 오히려 청자 혹은 전달자의 자아를 주입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5].

    증언자의 기억을 더 잘 듣고 전달하기 위해서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까? 《섬 이야기》는 무대 양쪽에 배치한 자전거를 통해 그 해답을 찾아나간다. 극의 초반부터 연출자와 배우 1인은 서로 다른 자전거에 앉아 페달을 밟는다. 바퀴가 돌아가면서 자전거에 장착된 발전기가 돌아가고, 그 발전기에서 비롯된 전력은 조명을 밝힌다. 극장에 공급되는 전력량에 비교하면 희미한 수준이지만, 그들이 페달을 밟아가며 생산해 낸 빛이 극장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자전거라는 장치는 극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지만, 무대를 비추기 위한 힘을 제공한다.

    듣는 자의 역할은 이러한 자가발전 자전거와 닮아있다고 느껴진다. 증언자들의 기억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지만, 그 증언을 밝힐 수 있는 추진력을 제공한다. 어설픈 개입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가며 자신조차 망각했던 기억들을 복원하는 장(場)을 밝게 비춰주는 것이다. 무언가를 ‘해주기’보다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과정을 통해 진실에 점차 가까운 기억들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함께한다.

    이러한 자가발전 자전거의 모습은 극장에서 청자의 위치에 놓인 관객들로 하여금 듣는 자의 책임과 자세를 깨닫게 한다. 극장 안에서는 듣는 역할을, 그리고 그 내용을 다시 극장 밖에서 전달하는 역할,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듣는 자의 위치에 놓이게 될 관객들에게 듣는 자가 가져야 할 책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관객들은 자기만의 자전거에 앉아 누군가의 기억을 밝혀줘야 한다는 역할을 습득하며 극장 밖을 나선다. 《섬 이야기》를 통해 듣는 자의 책임을 아는 청자들이 탄생한다. 그리고 그 청자들은 앞으로 더 많은 기억들을 밝히며 진실의 조각을 이어붙이는 과정에 함께할 것이다. 진실을 향한 여정은 그렇게 연극이 끝난 후에도 지속된다.     

나오며

    4·3의 진실을 향한 여정은 여전히 요원하게 느껴진다. 매년 4월 3일이 가까워지면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향해 원색적 비난을 퍼붓는다. 좌우세력 간의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희생이라는 점에서 4·3은 그들의 레드콤플렉스를 더 강하게 자극하고, 애도와 진상규명에 대한 목소리를 모두 ‘빨갱이들의 생각’으로 치부해버린다.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와 보고서 발간, 관련 특별법 제정이 이루어졌음에도 여전히 끝나지 않는 문제다.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더 많은 상처가 생겨나는 상황이다.

    고고학적 상상력을 담아낸 시를 창작했던 故 허수경 시인은 “모든 해석의 결말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오독의 허당을 감수하고라도 뭔가 말을 해 보려는 자의 좌절”이라고 말했다[6]. 4·3을 둘러싼 진실을 향한 여정에 쏟아지는 비난들은 이러한 “오독의 허당”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그 앞에서 “뭔가 말을 해 보려는 자”들은 좌절당했고, 그들의 좌절 앞에 극단주의자들로부터 비롯된 비난의 목소리는 점차 그 강도가 높아진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끊임없이 말을 한다. 《섬 이야기》 또한 권력이 은폐한 진실을 드러내며 말하기 위한 시도에서 출발한다. 말을 하고 싶은 창작자들이 모여 공동창작의 형태로 작품을 만들어내고, 말을 하고 싶은 관객들은 극장이라는 하나의 공간에 모여 함께 말을 한다. 극장은 그렇게 말을 하고 싶어하는 자들을 이어 붙이고, 이러한 연대는 좌절 앞에서도 끊임없이 말을 하기 위해 나아가는 용기를 가져온다. 그렇게 그들은 말을 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나간다.

    《섬 이야기》는 좌절된 개인들의 연대를 통해 진실을 향한 용기를 이끌어낸다. 이것은 개인적 탐구와 창작을 통해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문학이나 여타의 예술 장르들과는 또 다른 힘을 갖는다. 이 힘은 여러 사람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며 연대하고, 그 작품이 하나의 공간에서 다수와 함께 공유될 때 비로소 발휘될 수 있다. 창작자와 창작자, 관객과 관객, 창작자와 관객은 하나의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연대를 위한 힘을 얻는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연대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 극장이 필요한 이유, 나아가 연극이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1] 한지희, “셰이머스 히니와 故허수경의 고고학적 상상력 비교”, 『동서비교문학저널』 (54), (서울: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 2020), 409-410쪽.

[2] 히토 슈타이얼, 『진실의 색』, (서울: 워크룸프레스, 2019), 41쪽.

[3] 앞의 책, 33쪽.

[4] 김은실, “4·3 홀어멍의 “말하기”와 몸의 정치”, 『한국문화인류학』 49(3), (서울: 한국문화인류학회, 2016), 320쪽.

[5] 김애령, 『듣기의 윤리』, (서울: 봄날의박씨, 2020), 92쪽.

[6] 허수경, 『모래도시를 찾아서』, (서울: 현대문학, 2005),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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