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국립극단에서 공연될 예정이었던 연극 《빙화》의 공연이 취소된다. 일본의 경제보복조치로 인해 경색된 한일 관계 속에서 형성된 반대 여론을 고려해 국립극단이 내린 결정이었다. 해당 작품의 작가인 임선규는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에 등재된 인물일 뿐만 아니라, 당시 친일연극제의 성격으로 개최된 이른바‘국민연극제’ 참가작일 뿐만 아니라, 《빙화》라는 작품 자체도 친일연극제의 성격을 가졌던 일제강점기의 ‘국민연극제’ 선정작이라는 점에서 논란을 빚었다. 취소 이전의 기획과정부터 논란에 휩싸였던 《빙화》는 취소 이후에도 친일 연극인과 그들의 작품을 둘러싼 논란의 단초가 되었다.
사실 연극계에서의 친일 논란은 《빙화》 이전부터 이어져왔다. 《빙화》를 포함해 국립극단이 2014년부터 진행해 온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에서도 유치진의 《토막》, 함세덕의 《산허구리》, 송영의 《호신술》, 채만식의 《제향날》 친일 논란이 있는 극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 바 있다. 그리고 유치진이 조선총독부로부터 불하받은 땅에서 사유화하여 운영 중인 남산예술센터 관련 이슈 등, 연극계 내에서는 일제의 잔재와 친일 청산과 관련된 주장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논란들은 국내 연극계에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유산과 친일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논란을 바탕으로, 연극을 담아내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극장’의 근대사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성을 상징하는 공간으로서의 극장의 의미를 살펴보고, 20세기 후반부터 점차 사회적인 ‘공론의 장’으로서 작용하며 시민들에게 담론을 제시하는 공간으로서 극장이 갖는 의미를 통해, 연극계를 둘러싼 논란들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II. 한국 연극과 일제강점기
근대적인 형태의 한국 연극은 그 시작부터 일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전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연극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거나, 일본인으로부터 전수를 받았고, 일본인과 함께 창작활동에 참여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일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로부터 한국에서 근대적 형태의 연극이 시작되었고, 해외의 희곡들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 또한 이들을 통해서였다. 또한, 친일 연극인들은 해방 이후에 그 행위에 대해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연극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친일’연극인으로 알려진 이들 중 일부는 해방 이후 월북하였는데,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러한 상황을 문화예술계 반공체제 구축에 활용하기 위해 남한에 잔류한 대표적 친일 연극인인 유치진에게 엄청난 특혜를 주었고, 유치진은 정권의 비호 아래‘남한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 입지를 다졌다. 그리고 이러한 연극인들로부터 연극을 배운 다음 세대 연극인들은 계속해서 연극계에서 활동했고, 그러한 흐름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연극교육기관 중 한 곳인 서울예술대학의 설립자가 유치진이라는 점은 일제의 영향력이 현재의 연극계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재까지도 대중극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신파극’은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연극을 근대화하고 서구화시키기 위해 '가부키'의 전통 밖에서 형성되었던 특수한 형태의 연극이 식민지 조선에 유입된 형태[1]이며, 전통으로부터의 탈피를 등장하며 일본을 통해 유입된 서양식 연극 형태인 ‘신극’은 지금까지도 한국 현대 연극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빙화》로 대표되는 ‘국민연극’[2]의 경우, ‘치욕의 역사임은 분명하지만 교량적 역할, 기획력, 장막극의 활성화, 극작술의 발전, 구성전개의 흥미를 유지한 목적극이었다는 점’ [3]등이 나름의 의의라는 학계의 평가가 존재하기도 하는 만큼, 친일과 관련한 논란은 현재 한국 연극의 근본적인 부분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III. 근대성을 상징하는 공간으로서의 극장
이러한 맥락 속에서 연극으로 대표되는 공연문화를 담아내는 극장이라는 공간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근대화와 친일논란을 재현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에 근대식 극장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의 공연문화는 탈춤과 전기수, 꼭두각시놀음이나 남사당패 등과 같이 저잣거리 등의 개방된 야외공간에서 관객들의 참여가 자유로운 형태로 발달하였다. 그리고 1902년에 대한제국 황실이 국내 최초의 실내극장인 협률사를 설치하면서 근대적 형태의 실내극장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후 한국의 공연문화는 원각사, 동양극장 등으로 이어지는 실내극장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다[4]. 열린 공간에서의 이야기 공유 행위로서 이루어졌던 공연문화가 실내극장이라는 폐쇄적이고 고정적인 공간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근대적 형태를 갖춘 극장의 등장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공연 방식과 완전히 다른 형태의 공연 문화가 탄생한다는 점에서, 극장은 근대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시선에서 추임새 등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던 전근대 시기 공연공간과 달리, 근대화와 함께 등장한 실내극장은 모두 같은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러한 공간적 변화는 관객들이 공연에 대해 가져온 인식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또한, 마을의 공터나 저잣거리 등에서 공연이 진행되어 공연에 참여하는 사람과 관람하는 사람을 제한하지 않고 자유롭게 공연이라는 행위에 참여할 수 있었던 전통적인 공연 방식과 달리, 입장권을 구입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실내극장의 시스템은 자본의 지불여부에 따라 행위에 대한 자격이 부여되는 근대사회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근대적 형태의 실내극장의 등장 이후, 전통적인 형태의 공연들이 국극, 창극, 마당극과 같이 실내극장에서 공연될 수 있는 형태로 변화하여 극장 내부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점 또한 전통적인 문화를 흡수하는 근대화의 진행 양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근대화 공간으로서의 극장은 일본의 영향과 잔재가 여전히 존재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상수(上手)와 하수(下手), 소대(小隊), 면막(面幕) 등 일본식 한자어가 빈번하게 사용되고, 제작현장에서도 아시바(あしば), 사이깡(さいかん), 니마이(にまい), 싼마이(さんまい) 등의 일본어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언어 뿐만 아니라 극장의 물성 또한 이러한 일본 주도 근대화의 유산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국립극장의 경우, 해방 이후에 지어진 극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부키 극장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근대극장의 형태를 그대로 모방하여 지어져 제한적인 공연 형태와 공간의 활용성 문제 등으로 지적을 받아 오다가 2018년에 리모델링에 착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에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문예회관들은 단시간 안에 양적 규모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극장 건축 양식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IV. 공론장으로 재탄생하는 근대 극장 : 남산드라마센터, 명치좌, 그리고 부민관
하지만, 극장이 단순히 근대화의 공간, 혹은 일제강점기의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공공문화공간으로서의 극장은 현대사의 다양한 맥락 속에서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거치며 계속해서 그 기능이 변화해왔다. 현재는 근대성 공간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의미와 기능을 가진 공간으로써 발돋움하고 있다. 특히, 다양한 사람들이 결집하는 공간이라는 점, ‘공연’이라는 하나의 텍스트를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공유하는 공간이라는 점, ‘근대성’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근대성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근대유산이라는 점 등, 근대적 공간으로서의 극장의 성격은 21세기 극장을 사회적 공론장의 형태로 변화시킨다.
극장은 그 자체로 시민들에게 공론의 기회로 작용하는 의제이자 담론으로 존재한다. 남산드라마센터(현 남산예술센터)는 유치진이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로부터 현재 드라마센터가 위치한 곳의 토지를 불하받은 후, 이후 미국의 록펠러재단 등으로부터 공공극장 운영을 전제로 지원을 받아 건립된 한국 최초의 현대식 극장이다. 하지만, 군사주의 정권과 냉전시기를 거치며 유치진은 박정희 군사정권으로부터 국가재건최고회의 특별명예회원으로 임명되어 운영비를 지원받는 등의 특혜를 받았다. 이후 드라마센터를 사유재산화하며 결국엔 자신이 설립한 학교법인 한국연극연구원(현 동랑예술원, 서울예술대학교의 법인)에 기부한다. 이후 서울예대가 이곳을 계속 사용하다가, 2009년부터 서울시가 서울문화재단을 통해 연간 10억원의 임대료를 부담하며 운영하는 남산예술센터로 현재까지 사용 중이다. 그러던 중, 2019년 서울예술대학 측이 임대 종료를 통보했고, 현재 계약 종료시점인 2020년 12월 이후의 운영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한 것이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서울예대의 결정에 대해 연극인들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불하받은 땅을 해방 이후 국가에 귀속시키지 않은 것도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공공극장 운영을 전제로 후원을 받아 건립한 드라마센터를 사유화하고, 서울시가 불법적으로 사유화된 재산에 연간 10억원의 세금을 투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2019년에는 연극인들의 자발적 단체인 ‘공공극장으로서의 드라마센터 정상화를 위한 연극인 비상대책회의’(공공정비)를 결성하여, 이와 관련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창작활동 등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다[5]. 남산드라마센터는 일제강점기와 냉전, 군사독재, 레드콤플렉스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근현대사의 논란들을 단적으로 담아내는 하나의 텍스트이자 오브제로 존재하면서, 연극인들을 포함한 시민들에게 사회적인 담론과 의제를 제시하고 있다.
명치좌(현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는 시민 담론의 결과물이자 상징과 같은 의미를 형성한다. 명치좌는 1936년, 당시 일본인거주지역이었던 남촌(현재의 명동, 충무로 인근)에 일본인 전용 영화관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았던 ‘최첨단’의 영화가 상영되었던 이곳을, 식민지의 수도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일본인 밀집지역에, 일본인 전용 공간으로 건립했다는 것은 일제의 자국 우월주의적인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시 공관을 거쳐 국립극장으로 활용되었다. 1973년에 국립극장이 현재의 위치(장충동)로 이전하고, 강남과 여의도 등이 개발됨에 따라 명동이 기존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점차 예술인들이 명동을 떠나기 시작한다. 이후 정부는 국립극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대한투자금융에 매각하였고, 명동은 문화예술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그러던 1993년, 연극인들과 명동상인들을 중심으로 명동 옛 국립극장 복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지속적인 노력 끝에 2003년, 문화관광부가 매입한 후 복원사업을 거쳐 현재의 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한다[6]. 문화적 목적을 상실하고 기업의 사옥으로 활용되던 건물이, 명동 인근의 관광특구 개발과 함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정부가 이를 다시 매입하고, 당초의 기능이었던 문화예술공간, 특히 대중문화예술이 아닌 연극 전용 극장으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은 문화예술에 있어 시민 담론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명동예술극장은 그러한 힘의 상징이자 증거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부관(현 서울시의회)의 경우 일제의 문화통치 하에 있던 1935년 건립되어 식민지 도시민들을 일본 제국주의의 부민으로 호명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도구로 출발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군국주의의 깃발 아래 일본 제국의 ‘국민’을 조직하는 제국 전쟁의 전시(戰時) 무대로 활용되었다. 부민관에서 개최되는 행사들은 분명한 메시지로 전쟁과 군국주의를 광고했다. 1941년부터는 친일연극단체인 ‘현대극장’이 유치진의 친일어용극 《흑룡강》을 공연하며 창단한 후 해방 때까지 부민관을 본거지로 활동했다[7]. 해방 이후에는 국회의사당, 세종문화회관 별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91년 지방자치제 도입과 함께 서울시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지방자치제가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를 선전하는 공간이 지방자치제의 상징인 서울시의회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근대적 극장의 재탄생을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의회’라는 형태가 가지는 공론장으로서의 의미를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적 맥락이 아닌, 시민의 공간이자 공론장으로의 극적인 전환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VI. 맺음말
서울과기대 문예창작학과 김미도 교수는 “유치진의 제자들이 연극계를 주름 잡아온 상황에서 그의 친일 문제를 노골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다. 이제는 유치진뿐만 아니라 연극계에 남겨진 친일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공과를 구분해서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라고 주장한다[8]. 그의 말처럼, 공연이라는 행위를 통해 무대 위에서 재현된 우리의 근대사와 연극계에 만연한 친일 관련 문제들을 마주해야 한다. 그러한 문제들과 직면하고 문제들이 공론의 장으로 나올 때, 비로소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의 해결책이 이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세한 규모로 인해 안정적인 공연 기회가 부족한 한국 연극계에서, 국립극단이라는 국내 최대 연극단체에서 친일 작가의 작품을 공연하는 것은 다른 작품들이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줄어들게 하는 것이라는 연극계의 걱정도 납득할 만한 주장이고, 그러한 우려들에 대해 공연 취소 조치를 내린 국립극단의 결정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립극단의 《빙화》 취소 결정으로 인해 관객과 시민들은 “일부 연구자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친일 연극의 실체를 수면 위로 드러내고, 비판적 성찰을 통해 부끄러운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는 기회”[9]를 빼앗긴 것이 아닐까.
연극은 무대 위에서 공연되며 관객들을 만날 때 비로소 작품의 의미와 예술성이 완성된다, 《빙화》와 같은 작품 또한 ‘연극’으로서 무대 위에 올라 관객을 만났을 때, 비로소 친일논란을 비롯한 근대사의 다양한 의제들을 시민들에게 제기하는 매개체로서 기능할 수 있다. 그리고 공연과 함께 관객들은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이러한 논쟁을 더욱 더 발전적으로 주고 받으며 의미 있는 결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공연 취소로 인해 극장 밖에서 존재하는 논란보다 더욱 복합적인 공론의 기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좌절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오늘의 관객들이 무대 위에서 근대사, 그리고 친일 등에 이야기와 마주할 때, 극장은 친일 논란에 대한 공론장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나아가, 극장을 통해 재생산된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대한 담론은, 그 자체로 새로운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발판이 될 것이다.
[1] 이광욱, “1930년대 한국 신극운동의 전개과정과 담론구조”. (서울: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8), 4-5쪽.
[2] 1942년, 일제 어용 연극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조선총독부와 매일신보사의 후원을 받아 1942년부터 1944년까지 3회 개최했던 ‘국민극경연대회’에 참여했던 작품을 가리킨다. 친일적이고 제국주의를 옹호/선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연극문화협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