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의 시대, 극장의 의미에 대하여
본 원고는 2020년 건국대학교 HK+사업단 모빌리티 인문교양센터가 진행한 [인문페어 에세이 공모전] 대학부문 동상을 수상하고, 도서출판 앨피가 2020년에 출판한 『코로나 시대 (임)모빌리티와 우리들의 이야기』173~180쪽에 수록된 동명의 글을 일부 개고한 것입니다.
그림자의 주인인 그대는 밝은 날에 더 밝은 빛을 가지고
얼마나 황홀한 모습을 보이리요.
보지 못하는 눈에게 그대의 그림자가 이렇게 찬란하노니!
대낮에 내 그대를 본다면,
내 눈은 또 얼마나 행복하리요.
한밤중 깊은 잠 속에 시력 없는 눈에도
불완전하고도 아름다운 그림자가 보인다면!
그대를 볼 때까지는 낮은 다 밤이요,
꿈에 그대를 본다면 밤은 언제나 밝은 낮이로다.
- <Sonnet No.43>, William Shakespear -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반, 페스트로 인해 영국의 극장들이 폐쇄되었다. 당시 연극인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셰익스피어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셰익스피어는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서사시와 서정시를 창작한 바 있다고 전해지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네트(Sonnet)'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네트를 감각적인 언어로 풀어낸 사랑이야기라고만 생각하는데,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셰익스피어의 사연과 함께 다시 보면 극장과 연극을 사랑했던 셰익스피어가 페스트의 시대에 그가 간절히도 원했을 극장의 부활에 대한 열망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는 코로나로 인해 다시 위기를 맞이한 2020년 극장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공연은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호흡함으로써 완성되는 예술이다. 누군가는 무대 위에서, 누군가는 무대 뒤에서, 누군가는 객석에 앉아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공연을 완성해간다. 그리고 이러한 공연을 담아내는 극장의 미학은 공연을 매개로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소통하는 과정에서 발휘된다. 이러한 성질과 관련하여, 극장의 미학은 그 실현 과정에 있어 여러 사람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에너지를 요하기에 혹자는 극장과 공연이 엄청난 사람들의 시간을 비용으로 하는 ‘비효율적’ 존재라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로, 기술의 발전으로 등장한 라디오나 영화 등의 매체가 이와 같은 공연의 비효율성을 해소하며 공연을 잠식할 것이라 예측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수많은 위기의 국면 속에서도 공연은 스스로의 위치를 지켰다. ‘시간이 곧 돈’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공연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공연은 사람들을 매혹시켰고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며 서로 소통을 하는’ 공연의 미학은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극장으로 향하게 했다. ‘인간은 이야기에 탐닉하도록 진화했다’[1]는 어느 학자의 말마따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야기에 매혹됐고, 그러한 이야기가 가득한 극장이라는 공간은 인간에게 비용과 효율성을 넘어선 자신들의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공간을 공유하는’ 공연의 미학이 위험요소가 되어버렸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공연은 그 존재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되었고, 수많은 극장들은 문을 닫고 예술가와 공연 단체들은 공연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사람을 한 공간에 모으는 것 자체가 팬데믹의 시대에선 엄청난 위험행위이니 만큼 사람들이 모임으로써 완성되는 공연의 미학은 코로나 사태에 있어 위험요소가 되었고, 사람들이 모일 수 없는 극장과 공연은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해버렸다.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극장은 계속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지를.
관객을 받을 수 없는 극장들이 생겨나면서 문득 이러한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과연 관객이 없는 극장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같은 시공간에서 출연자와 제작진, 관객이 함께 만나 공연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 공연의 미학이라면 소통의 주체 중 하나인 관객이 사라진 공연은 그 미학을 상실하는 것일까? 실제로 수많은 극장과 공연단체들은 이러한 질문에 직면해있는 상황이다. 답을 찾지 못한 극장은 일단 ‘휴관’ 혹은 ‘공연 취소’라는 방법을 통해, 잠시 제자리에 멈춰 숨을 고르며, 그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관객이 없는 공연’이 가지는 의미가 과연 존재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앞서는 것은 사실이다. 엄청난 시간과 노력, 에너지를 소비하면서도 관객들이 극장을 찾는 것은, 바로 그 시간과 그 공간에 창작자와 수용자가 함께 존재하면서 호흡하고 소통을 한다는 지점인데, 이러한 소통이 빠져버린 연극은 다른 예술 장르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게다가, 공연에 관객이 없다면 공연을 통해 관객과 창작자들이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극장 또한 그 존재의 이유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소통의 장에 소통이 없다는 점, 그리고 그 소통이 극장이 담아내는 공연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미학적 요소이자 존재가치라는 점에서 관객이 없는 극장의 존재 의미에 있어서는 회의적인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러한 상황은 기존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극장의 의미와 존재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창의적인 계기로 전환될 수도 있다. 난해함과 진입장벽으로 인행 관객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공연들이 예술적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듯, 관객의 수나 흥행 성공여부만으로 공연의 예술성과 존재가치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코로나로 인해 관객을 잃어버린 오늘의 극장 또한 그 존재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관객은 없지만, 창작자들은 관객이 없더라도 만들고 소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극장 너머의 관객, 그리고 사회와 어떻게 자신을 연결시키고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같은 공간에서 소통하고 연결되지는 못하지만, 계속해서 소통과 연결의 방법을 고민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극장과 공연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극장들이 가지는 이러한 고민들은 관객들이 돌아올 앞으로의 극장에서 더 큰 역할을 해낼 것이라 믿는다.
극장을 향한 관객들의 발걸음을 멈춰버렸지만, 극장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은 온라인을 통해 여실히 들어난다. 그리고 극장은 코로나로 인해 단절되어버린 극장의 소통을 다시 한 번 되살리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코로나의 위험 속에서도 극장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가던 극장은 오프라인에 국한되었던 자신들의 공간을 온라인에서도 찾기 시작한다. 마침내, 온라인에서의 공간을 찾아 나선 극장들은 ‘온라인 공연 생중계’라는 방법을 도출해낸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의 극장들은 인터넷을 통해 공연을 선보이는 ‘온라인 공연중계’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극장의 공연들을 생중계로 선보이기도 하고, 극장의 창고에 가득 찬 공연 영상들을 공개하기도 한다. 이러한 극장의 새로운 이야기 방식에 관객들은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온라인을 통해 팬데믹의 시대에도 극장을 찾고 있다. 비록,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지는 않지만, SNS와 실시간 댓글 등의 방식으로 함께 공연의 이야기를 나누고 공연을 완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이동과 교류가 자유로워진 정보사회에서도 오프라인의 같은 공간에 있음으로서 그 존재를 지속해왔던 극장이 이러한 온라인 공간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와 소통을 지속한다는 점은 매우 획기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온라인으로의 극장 공간 확장은 어쩌면, ‘모빌리티 총량의 법칙’이 세상에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물리적인 이동 없이도 공간의 전환과 다른 공간과의 연결이 가능해진 시대에서 이동의 방식과 영역은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고,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결집과 이동을 중심으로 존재해온 극장 또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기존의 방식을 넘어선 온라인으로의 이동을 통해 사람들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로 인해 이동에 있어 엄청난 제약을 받았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팬데믹과 같은 위기에도 모빌리티는 다른 방식으로나마 유지되고 지속되며 인간들의 연결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극장의 이와 같은 온라인 공간 확장은 새로운 모빌리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온라인 중계는 기존에 극장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극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극장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들 중에서도 온라인 공간에서의 극장 경험을 통해 새로이 극장의 소통과 연결에 함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연결은 코로나 이후, 오프라인 극장으로도 이어져 온라인을 넘어선 오프라인 공간으로의 확장과 모빌리티 증가를 가져온다. 이와 같은 모빌리티의 증가는 오프라인 공간의 축소로 인해 줄어든 모빌리티를 채워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극장의 성장기반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 우리가 코로나와 같은 위기를 또 다시 마주했을 때, 그저 인류의 한계에 좌절하는 것을 넘어, 발전적이고 지속가능한 미래의 대책에 대해 고민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러한 극장의 위기가 처음 있는 일만은 아니다. 새로운 매체와 예술장르가 등장할 때마다, 극장은 새로운 매체에 의해 쉽게 대체될 것이라는 예측이 빈번하게 등장했고, 실제로 단기적으로는 극장이 그 입지를 위협받는 듯 했다. 하지만, 극장은 새로운 매체들이 보여주었던 혁신과 새로움을 흡수하고, 그들이 해소해주지 못하는 극장만의 매력을 대중들에게 어필하면서 계속해서 자신의 필요성을 입증해왔다. 계속되는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도 극장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의 상황이 기존보다 희망적인 부분을 찾아보자면, 바로 극장이 가진 이 위기는 극장의 ‘필요성’에 대한 위기나 문제제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기존의 위기들이 극장의 대체제가 등장함에 따라 극장의 필요성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발생했던 위기 국면이었다면, 지금의 문제는 극장이 과연 그 ‘시공간의 미학’이 가지는 위험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에서 기인한다. 즉, 극장이 대체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가 아니라, 극장이 더욱 안전하게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탐색과 토론, 성찰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사회를 덮쳐버린 팬데믹의 시간은 극장에게 있어, 영상중계와 같은 공연의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과정을 통해 아직 극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엄청난 성장에 가려져 생각하지 못했던, 극장이 가진 문제점과 한계, 그리고 지속가능한 극장을 위한 고민과 토론의 시간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마냥 절망적으로 좌절을 할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페스트가 사라지고, 다시 극장에 자신의 이야기가 울려 퍼질 날을 학수고대했을 셰익스피어처럼, 전 세계의 극장과 예술가들도 관객들과 함께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소통하며 새로운 이야기로 극장을 가득 채울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페스트의 시대를 넘어왔듯, 팬데믹의 절망 속에서도 답을 찾아 다시 이야기로 가득한 극장의 찬란한 나날과 마주할 것이다. 코로나라는 ‘한밤 중 깊은 잠’에서 깨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와 함께 활기 넘치게 다시 태어날 극장의 생동하는 ‘밝은 낮’을 맞이할 것이다.
[1] 조너선 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 (서울: 민음사, 2014), 2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