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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Feb 18. 2024

핏줄 따라 달려가는 추악함의 로드씨어터

연극 《테디 대디 런》

이 리뷰는 연극의 결말에 대한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테디 대디 런》은 아빠를 찾는 윤서와 니나의 여정을 따라가는 연극이다. 한국인 윤서와 ‘코피노(Kopino)’[1] 니나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어둡고도 복잡하게 연결된 관계다. 어린 시절 우연히 나누었던 의문의 채팅으로 인연을 맺었고, 청소년이 된 후 필리핀에서 다시 마주한 이들은 마닐라 곳곳을 누비며 자신들의 비밀에 점차 가까워진다.

    이러한 여정은 자신들이 가진 공통분모를 규명하는 과정임과 동시에, 한국과 필리핀이 가진 접점의 민낯을 가시화한다. 《테디 대디 런》이 보여주는 추격의 서사는 범죄의 온상처럼 여겨지는 필리핀의 어두운 이면에 숨겨진 한국의 영향력을 조명한다.


    1부는 윤서의 이야기다. 윤서의 엄마와 아빠는 이혼한 부부다. 윤서는 엄마를 따라 미국에 거주 중이고, 아빠는 필리핀에서 이런저런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필리핀에서 오랜만에 아빠와 만난 후 미국으로 돌아가던 중 미국행 비행기가 결항되자, 윤서는 다시 아빠의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아빠는 온데간데없고 집안은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로즈를 만난다. 필리핀 사람이지만 한국어에 능통한 로즈는 윤서의 아빠가 테디에게 돈을 빌린 후 쫓기고 있으며, 자신은 그 돈을 받기 위해 왔다고 말한다. 이유는 다르지만 윤서의 아빠를 찾아야 한다는 동일한 목표를 가진 두 사람의 동행이 시작된다.

    로즈와 함께 마닐라 곳곳을 누비던 윤서는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인다. 윤서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비단 아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빠 친구의 집에서는 '코피노'로 추정되는 갓난아기와 만나고, 한식집 건물에서는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로 가득 찬 도박장을 목격한다.

    아빠를 찾기 위한 여정은 의문의 갱단으로부터 도망치는 도피의 여정이 된다. 윤서의 공포심은 커져만 간다. 자신이 보아왔던 네온사인의 휘황찬란함은 온데간데없고, 뒷골목을 빽빽이 채운 회색빛의 빈민가를 지나며 더더욱 혼란을 느낀다. 가방과 지갑마저 잃어버린 윤서는 로즈와 함께 공동묘지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아침, 무덤지기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다. 자신의 핸드폰에 달린 테디베어와 닮은 인형을 만드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윤서는 그 공장이 아빠를 쫓는 테디라는 인물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 확신한다. 공장으로 향하는 길에 윤서는 로즈에게 왜 자신을 도와주느냐고 질문한다. 자신이 가진 비밀 때문이라는 로즈의 대답에 윤서는 어린 시절 의문의 아이와 나누었던 채팅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세상에 태어난 비밀 때문에.’ 그제야 깨닫는다. 사실은 로즈가 어린 시절 채팅을 나누었던 아빠의 불륜녀의 딸, 니나였다는 것을.

    인형 공장에 잠입해 마주한 풍경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곳은 마약 유통을 위한 곰인형을 만드는 곳이었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앙헬레스 호텔에 테디가 나타날 것이라는 첩보를 듣고는 그곳으로 향한다. 윤서는 외제차에서 내리는 테디를 발견한다. 가 테디베어를 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자, 윤서의 핸드폰에 전화가 오기 시작한다. 마약과 도박, 성매매로 이름을 날리던 필리핀의 한인 사업가 테디가 실은 윤서의 아빠였던 것이다.     


    윤서가 마주한 충격적인 진실과 함께 무대가 암전 되면, 니나의 시선으로 2부를 시작한다. 니나는 윤서의 아빠와 필리핀 여성 로즈 사이에서 태어난 코피노다. 니나의 아빠는 니나가 태어나기도 전에 로즈를 떠났고, 로즈는 홀로 니나를 키우다가 가난과 에이즈로 죽어간다.

    니나는 갱단의 일원이 되어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동료인 텐이 한인 사업가 테디를 제거하는 의뢰를 받았다고 말한다. 텐이 보여준 사진 속 테디라는 남자는 자신을 버린 아빠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원망과 분노에 휩싸인다. 그리고 결심한다. 갱단이 테디를 죽이기 전에 자신이 먼저 아빠를 죽여 복수를 하겠다고.

    그렇게 찾아간 아빠의 숙소에서 윤서를 만난다.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한 한국인의 모습을 보자 니나는 원망은 더 커져간다. 분명 같은 아빠에게서 태어났는데 운명의 한 끗 차이로 빈곤 속에 성장한 자신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윤서의 삶의 격차 속에 질투심이 생겨난다. 윤서와 함께라면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되고, 곤란한 상황에서 미끼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아빠 찾는 것을 도와달라는 윤서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다. 자신의 이름을 로즈라고 속인 채, 니나와 윤서의 동행이 시작된다.

    빈곤과 범죄가 팽배한 마닐라의 풍경을 보면서 충격에 휩싸이는 윤서의 모습에, 니나는 한편으로 고소해한다. 자신과 달리 윤택하게 살아온 윤서에게 느낀 질투심을 회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과 윤서의 처지에서 공통점을 발견해 간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빠에게 복수하겠다는 절박함과 함께, 윤서를 진심으로 돕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커져간다.

    그리고 마침내 아빠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게 된 앙헬레스 호텔에서 니나는 끊임없이 추격전을 이어간다. 이제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사력을 다할 때, 엄마와의 추억이 스쳐 지나간다. '코피노'라는 이유로 차별과 혐오에 휩싸였던 자신을 희망을 불어넣으며 위로해 주었던 엄마를 떠올리자 어린 시절 가졌던 자기혐오가 복수심과 뒤엉켜 폭발한다. 결국 아빠가 도착한 건물 밖을 향해 유리창을 깨고 몸을 던진다.

    나무에 걸려 다행히 목숨을 건진 니나는 경찰과 아빠가 둘러싼 사이로 윤서에게 총을 겨누며 인질극을 벌인다.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들켰음에도 윤서에게 좋은 아빠 행세를 하려는 테디를 보며 환멸을 느끼고, 윤서가 받은 충격과 그동안 자신이 혐오해 왔던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니나는 윤서에게 조심히 돌아가라는 당부와 함께 도망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윤서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니나와 함께 자신의 여정을 이어가기로 결심하며 극이 마무리된다.


    《테디 대디 런》은 로드무비의 문법을 무대 위에 구현해 낸 ‘로드씨어터’[2]다. 로드무비의 형식을 차용하기 위해 영화적인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 각 부분의 소제목과 인물들이 위치한 장소를 자막으로 설명하는 것은 로드무비의 대표적인 전략이다. 음악 또한 로드무비에서 한 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익숙한 장르의 음악이다. 연극에서 영상과 음악을 활용하는 것이 흔한 전략이라고는 하지만, 《테디 대디 런》은 스크린 위의 로드무비의 미장센을 극장 안에서 보여주기 위한 연출 전략을 충실이 이행한다.

    이러한 탓에 작품의 전개 방식이 희곡보다 시나리오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동일한 사건을 1부와 2부로 나누어 서로 다른 인물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것은 최근 영화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연출법 중 하나다. 영화의 경우에는 카메라의 시점이라는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시선이 바뀌면 화면도 함께 바뀌는 극명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모든 관객이 무대를 동일한 방향으로 바라보고 있는 연극에서는 그러한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테디 대디 런》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배우들의 동선과 몸짓의 방향을 바꾸고,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사건을 이어가는 1부와 달리 2부에서는 사건을 상당 부분 축약해 속도감을 부여한다. 윤서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따갈로그어 대화가 니나에게는 한국어로 들리는 식으로 연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충분치는 않아 보인다. 장면 간의 연결성을 높이기 위해 윤서와 니나의 독백 대사를 동일하게 처리하다 보니, 1부와 2부가 과도하게 반복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두 시선의 차이를 보여주는 장치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그럼에도 극장이라는 고정된 공간에서 다채로운 공간감을 선사하기 위한 시도가 눈에 띈다. 로드무비는 공간의 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되기 때문에, 다양한 공간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연극은 극장이라는 공간적 제한성으로 인해 공간감을 재현하는 것에 한계를 갖는다. 《테디 대디 런》은 움직임으로 이것을 극복한다. 배우들은 일상적이거나 사실적인 움직임보다는 무용에 가까운 몸짓으로 무대를 채운다.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풍성하고 위트 있는 움직임은 리듬감을 불어넣는다. 배우가 만들어내는 신체적 리듬감을 통해 관객들은 공간 이동 없이도 다채로운 이미지를 경험할 수 있다.


    한국과 필리핀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너무도 가까워서 어둡고 추악한 치부마저 공유한다. 한국인들은 범죄의 온상이라 말하지만, 그 중심에 한국인도 속해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코피노’를 둘러싼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자신의 자녀를 버린 채 필리핀을 떠나는 한국인들의 파렴치함이 니나와 같은 아이들을 빈곤과 범죄, 그리고 자기혐오 속에 성장시켰다. 뿐만 아니라 마약과 빈곤, 총기범죄와 살인의 나라라는 오명을 쓴 필리핀의 현주소에서 한국인의 책임을 과연 배제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윤서의 ‘순진한 무모함’은 이러한 메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니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범죄가 벌어지는 공장으로 진입하며 위험에 처하고, 자신이 몰랐던 가난한 이들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며 도망치는 모습에서 때로는 답답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것은 필리핀을 대하는 한국사회의 태도와 상당히 닮아있다. 갱단을 고용해 한국인을 살해하는 것도, 한국인에게 마약을 유통하는 것도, 필리핀의 도박판이 커지는 것에서 한국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3부에서 니나와 윤서가 함께 도망치는 장면에 아쉬움이 남는다. 이들은 어두운 세계로부터 벗어나 서로에게 의지하며 끊임없이 달려가며 밝은 내일을 기약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단죄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은 채 그저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게다가 한국이 지금껏 외면과 기피를 통해 필리핀 한인사회를 둘러싼 문제를 키워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미래 세대에게 주도권을 넘기는 것처럼 느껴지는 결말이라는 생각도 든다.


    2023년 창작산실에 선정된 연극들에서 유독 ‘가려진 이면’에 대한 이야기가 눈에 띈다. 일제강점기 여성 테러리스트 안경신(《언덕의 바리》)와 좌파진영의 여성 독립운동가 미옥 앨리스 현(《아들에게》), 그리고 필리핀과 한국의 어두운 교집합에 이르기까지, 가려진 것들을 무대 위에서 가시화하려는 시도에 주목하게 된다. 특히나 《테디 대디 런》은 한국 사회 애써 외면하려 했던 추악함을 무대화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한국 사회가 경험한 빛나는 성장의 속도와 시간만큼, 우리가 마주할 치부도 상당할 것이다. 그것을 직면하는 순간이 불쾌하고 역겨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 없다. 빛의 이면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있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그림자마저도 우리의 모습이기에.


본고는 마방진의 《테디 대디 런(Teddy Daddy Run)》의 리뷰이다. 필자는 2024년 2월 16일부터 2월 25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진행되는 초연을 바탕으로 원고를 작성하였음을 밝힌다.

[1] 한국인(Korean) 남성과 필리핀인(Filipino)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일컫는 말. 필리핀에 체류하는 한인 남성들이 자녀의 양육을 책임지지 않은 채 귀국한 뒤, 필리핀에 남겨진 여성들이 홀로 자녀를 키우는 것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바 있다.

[2] 일반적으로 ‘로드씨어터(Road Theatre)’는 극장이 아닌 거리에서 진행되는 연극을 일컫는 표현이다. 이러한 용어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필자의 경우에는 로드무비 형식의 연극을 ‘로드드라마(Road Drama)’라 지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보지만, 본 작품의 제작진은 ‘로드씨어터’라 표현하고 있기에 해당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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