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더 라스트 리턴>은 영국의 극작가 소냐 켈리(Sonya Kelly)의 희곡을 무대화한 것으로 2022년 영국 Mick Lally theatre에서 초연했다. 국내에서는 윤혜숙 연출, 두산아트센터 제작으로 2024년 4월 30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초연했다.
인기리에 전석 매진을 기록한 연극의 마지막 공연. 취소표가 나올지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 현장대기줄을 서는 사람들. 남일 같지가 않다. 나만 해도 이 공연의 취소표를 기적적으로 구해 관람하러 왔으니. 게다가 현장에서 줄을 서는 쪽보다 줄을 세우는 쪽에 더 가까웠던 만큼, 이 블랙코미디가 웃음이 나지만 마냥 웃기지만도 않았다. 무엇보다 전기간 전석매진을 기록한 이 공연에서도 빈자리가 눈에 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티켓을 구입해 극장으로 들어가는 건 다분히 정치적인 행위다. 일정 금액을 지불한 이에게만 출입의 권리를 부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지불능력과 희소성이 교차하는 복잡다단한 정치경제학의 현장이다. <더 라스트 리턴>은 이런 단편적인 아이디어를 실제로 무대 위에 구현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거쳐 객석에 앉은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처음엔 그저 우스꽝스러운 코미처럼 보인다. 고작 티켓 한 장으로 온갖 정치적, 철학적 수사를 늘어놓는다. 사실은 티켓을 얻고 싶다는 진심을 숨긴 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지만, 결코 그 욕망은 가려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신경전과 논쟁, 그리고 크고 작은 아수라장의 연속이다. 공연은 마치 20세기 전후의 부조리극[1]을 연상시키듯, 고작 티켓이라는 사소한 목표에 거창하고도 현학적인 대사를 갖다 붙인다. 관객들은 점점 긴장을 풀고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감상하게 된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대기자가 추가될 때마다 국면이 조금씩 전환된다. 교수와 회계사로 시작해 난민여성과 상이군인이 나타나며 그 신경전은 더욱 치열해진다. 교수는 자신의 지병과 우유부단함 사이에서 휘둘리고 회계사는 이간질과 선전선동을 일삼는다. 군인은 군대의 정훈을 연상시키는 전략을 구사하며, 난민은 말이 통하지 않는 척 앞자리를 사수한다. 공연시간이 다가올 수록 이들의 고상함과 선한 외양은 붕괴되고 치졸한 개싸움만이 남는다. 그리고 유치하게만 보이던 개싸움은 잔혹한 살인의 현장으로 뒤바뀐다. 티켓을 둘러싼 혼란은 매표소 직원의 유혈진압에 의해 해소된다. 티켓을 파는 것만 자신의 업무일 뿐 줄을 세우는 것은 자신과 무관하다며 시종일관 기계적인 응대를 이어오던 직원은 결국 이 모든 상황을 죽음으로 해결한다. 문제의 시작점에서는 그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은 채 수수방관하다, 문제가 커지고 나서야 비로소 강제적인 해결책으로 개입해 문제를 더 키우고야 마는 공권력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있다. 게다가 '티켓을 판매하는 것과 티켓 판매 줄을 세우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라는 말도 안 되는 설명에 분개하다가도 그 부조리는 지적하지 못한 채 서로에 대한 공격만을 일삼는 대기자들의 행동 또한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전반부의 부조리극이 다소 길고 쳐진다는 생각이 들며 지루해질때 쯤, 공연은 교수를 사살하며 장르를 스릴러로 변주시킨다. 객석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사실 이건 핏빛으로 가득한 세계질서의 조리를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극명히 드러낸다. 고작 티켓 때문에? 라는 생각도 들지만,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폭력과 식민지배는 정말 사소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세상의 질서란 원래 그렇게 하찮고 무서운 것이다. 별 거 아닌 것으로부터 시작한 거대한 문제를 보여주기에 티켓은 아주 좋은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가진 정치경제학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부조리극으로 시작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2]로 급격히 방향을 트는 전략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고 본다.
다만 결말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든다. 이 모든 역경을 딛고 티켓을 쟁취한 최후의 승자는 난민할인으로 티켓을 구입한 후 되팔아 차액을 얻고자 하는 난민이다. 티켓을 구입하고 극장을 나서던 길에 회전문 너머로 그는 그토록 찾아헤메던 자신의 딸과 마주한다. 사실 그 딸은 이 모든 혼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가방으로 자리를 맡아둔 채 극장 밖 커피숍으로 간 '여자애'의 자리이다. 이러한 대기 방식이 과연 타당한가, 를 두고 교수와 회계사 사이의 최초의 싸움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단 한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다가 마지막에서야 자취를 드러낸 아이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 '그저 그 자리에 존재했을 뿐'인 제3세계 국가를 둘러싼 강대국 간의 갈등이 파멸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이라 짐작해본다. 하지만 이것을 나름의 '반전'으로 사용했다면, 이러한 반전이 공연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좀 더 면밀한 해석이 필요해보인다.
유혈사태가 끝난 이후 엄마와 아이가 서로를 끌어안으며 만감이 교차하는 재회를 하고 직원들은 아무렇지 않게 시신을 수습하며 핏자국을 지운다. 그 모습 뒤로 푸른 빛의 조명이 비추면, 마치 CSI에서 볼 법한 장면이 연출된다. 그동안 닦아냈던 핏자국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하얗게만 보이는 벽면도 실은 핏빛으로 가득한 세계 위에 세워진 것임을 보여준다. 회계사를 향해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일갈하던 난민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투영된다. 애초에 난민이 그 극장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극장 벽면처럼 핏자국이 낭자한 고국의 현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곳으로부터 도망친 후에도 여전히 핏자국 위에 서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연극 <힌덴부르크로 돌아가다>의 제목과 그걸 쓴오펜하이머라는 작가의 이름이 오펜하이머라는 사실에서부터 이미 예견된 결말일지 모른다. 수많은 인명피해를 야기한 20세기의 항공기 사고처럼, 세상을 초토화시킬 무기를 만들어낸 과학자처럼, 티켓에 대한 욕심은 모든 것을 단숨에 해치워버린다. 과도한 욕심이 파멸을 이끈다는, 마치 도덕책같은 말들은 유혈이 낭자한 폐허를 통해 현실의 문제로 구체화된다. 결국 난민이 최후의 승자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원하는 걸 과연 쟁취했는지는 의문이 든다. 애초에 그가 원했던 것 티켓이 아니라 암표 판매를 통해 얻게 될 수익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우리 모두가 난민의 삶을 살아갈 지도 모른다는 경고처럼 느껴진다. 난민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폐허가 된 세계에서 모두가 난민으로 살아가는 삶.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권리만 울부짖는 세계에 예견된 결말은 그것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이것이 자기연민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든다. 대기하는 모든 이들은 자기가 얼마나 불쌍하고 절박한지 어필한다. 후속세대의 위협, 직장 내에서의 사회생활, 전쟁 이후의 트라우마, 목숨을 건 탈출. 이 모든 것은 스스로가 티켓을 가져야 할 근거로 활용된다. 하지만 '내가 제일 불쌍해'라는 자기연민은 타인에 대한 공감적 사고를 가로막는다.
최근 몇 년간 화두가 되고 있는 '공정' 담론은 이러한 자기연민의 연장선상처럼 보인다. 소수자에 대한 권리 보장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말하며, 소수자보다 사실은 자신이 더 불쌍한 존재라 주장한다. 자신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침해되어 온 소수자들의 권리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티켓을 쟁취한 난민의 사례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가 티켓을 얻게 된 방식의 '불공정성'에 대한 논의를 차치하더라도, 이 세계의 질서가 정말로 공정했더라면 그는 난민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티켓을 얻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연민으로 쌓아올린 '공정'에서 더 큰 불공정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공정'이라는 가치는 그저 자기연민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한 레토릭으로 전락할 뿐이다.
누구에게도 공감하지 못하는 자는 누구에게도 공감받지 못한다. 공감해주는 이 하나 없이 홀로 떠다니는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표류하는 경계인들을 우린 난민이라 말한다. 공감 없는 자기연민의 결말은 결국 모두가 '난민'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기연민과 잔혹한 공정으로는 티켓이라는 종이 말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목적이 티켓 그 자체는 아니지 않은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극장에 '함께' 앉아 공연을 보는 즐거움이다. 혼자뿐인 객석에서의 공연이 즐거울 리 없다. 객석이 하나 둘 채워질 때 비로소 공연은 완성되는 법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 제 1,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대 유럽을 중심으로 등장한 연극의 한 장르로, 논리적으로 조리에 맞지 않는 상황과 대사를 통해 인간사회의 부조리함을 풍자하는 연극 양식이다.
[2] Deus ex machina. '기계장치의 신'이라는 뜻으로, 고대 그리스 비극의 결말부에서 상황을 꼬일대로 꼬아놓은 뒤 기계장치를 통해 신(의 역할을 한 배우)을 등장시킴으로써 단숨에 사건을 해소해버리는 서사적 기법을 말한다. 특히 살인, 저주 등 비현실적이거나 굉장히 극단적인 방식으로 결말을 맺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