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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Sep 10. 2024

통조림의 뚜껑이 열리는 순간

연극 《양질의 단백질》

서사림이 제작한 연극 《양질의 단백질》은 김연주가 쓴 동명의 희곡을 이은혜가 각색하고 연출했으며, 2024년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나온씨어터에서 공연되었다.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다.

    통조림의 가장 편리한 점이라고 한다면, 상하지 않고 오랜 기간 음식을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높은 온도와 압력을 활용한 가공 덕분에 세균과 곰팡이로부터 안전하게 음식을 섭취할 수 있다. 제조일자가 100년도 넘게 지난 통조림을 개봉했는데 그 어떤 부패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통조림이 좋은 음식이냐고 묻는다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일단 통조림은 개봉하기 전까지 외부의 어떠한 환경적 변화에도 끄떡없지만, 단단하게 밀봉된 뚜껑을 따는 순간 급속한 변질이 시작된다. 완벽하게 멸균된 통조림은 마치 면역력이 전혀 없는 인간처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더 취약하기 때문이다.


    《양질의 단백질》은 이렇듯 완벽하고 안전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취약한, 마치 통조림과 같은 세계를 조명한다. 머루와 오디는 위험이 도사리는 바깥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는 집 안에서 생활한다. 두 아이는 이른 아침에 출근해 늦은 시간까지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를 얌전히 기다린다. 이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것은 엄마가 공장에서 한가득 챙겨 오는 통조림 햄이다. ‘진공과 멸균, 빈틈없는 포장’으로 둘러싸인 ‘완벽한 분홍햄’을, 마치 스테이크처럼 접시 위에 올려놓고 포크와 나이프를 통해 조금씩 썰어 먹으며 이것이야말로 안전하고 완전한 음식이라 굳게 믿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라고 주장하는 이가 집에 들어선다. 매력적인 외모와 향기의 소유자라는 엄마의 설명과 달리 악취만을 풍기는 모습이다. 게다가 양육에 대해 어떠한 책임을 지지 않았음에도 두 딸에게 가부장의 권위를 행사하려 한다. 아빠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두 사람은 그의 몸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고, 모멸감을 느낀 아빠는 두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가 머루를 때리려고 하는 찰나, 오디는 햄을 썰어먹을 때 사용하던 칼로 아빠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남편의 시체를 발견한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아빠라며 거짓말하는 나쁜 사람을 해치웠다며 변명하는 아이들을 뒤로 한 채 시체를 들춰업고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암전이 된 무대에서는 물컹함과 단단함이 뒤섞인 질감의 물체를 써는 톱질 소리만이 들려온다. 이후 아이들이 먹는 통조림에 털이 섞여 있다는 대사로부터 우리는 불쾌한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살인이 이루어진 지 얼마 뒤, 집주인이 다시 머루와 오디만 남은 집을 찾아온다. 그러고는 이 집에서 살인이 일어난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집주인은 엄마가 범인이라 확신하며 아이들을 위협하고, 이번엔 머루가 그런 집주인을 스테이크 칼로 살해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엄마는 어떤 반응이나 꾸짖음도 없이 홀연히 시체를 들춰업고 집을 나선다. 소름 돋는 톱질소리를 뒤로 한 채.


    두 번의 살인 이후 머루와 오디의 세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부패한 통조림처럼 더욱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몸도 조금씩 뚱뚱해져 간다는 생각은, 자신들의 가슴을 쳐다보는 택배기사의 눈빛과 함께 확신으로 변해간다.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 신체에 대한 혐오감으로 이어지고 자신들이 죽인 아빠와 집주인의 살이 자신들에게 들러붙었다 두려워한다.

    이들은 운동과 극단적인 절식을 통한 다이어트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두 아이를 더욱 피폐하게 만든다. 급기야 다이어트에 지친 오디가 화장실에 숨어 간식을 먹고, 그런 오디를 향해 머루는 욕설과 모욕을 쏟아낸다. 그전부터 미묘한 차이를 보이던 두 사람의 생각은 마침내 완전히 분열되기 시작하고, 두 사람의 육탄전으로 이어진다.

    한편, 집 밖의 세상에서는 살인자와 함께 살 수 없다고 외치는 시위대가 머루와 오디의 집 앞을 가득 메운 상태다. 그리고 더 이상 비인간적인 삶을 감당할 수 없었던 오디는 집 밖으로의 탈출을 결심한다. 하지만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집안에 널브러진 머루에게선 어떠한 생기나 의욕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엄마도 오디도 없는 집에서 머루만이 바퀴벌레들과 함께 공허하게 남은 채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양질의 단백질》은 ‘순수’하고 ‘소녀다운’ 두 아이의 세계가 대상화와 살인을 거쳐 피폐한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서사의 과정을 키치하게 풀어낸다. 불쾌하고 잔혹한 이야기는 웃음으로 시작해 관객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블랙코미디의 문법을 충실히 이행한다. 특히 아무리 불쾌한 모습도 코미디로 구현하는 방식은 취약함을 숨긴 채 안전한 음식처럼 포장된 통조림의 세계와 너무도 닮아있다. 경쾌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시작해 잔혹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전개는 강요된 ‘소녀다움’으로 인해 일그러진 인물들의 모습을 더 불쾌하고 강렬하게 표현해낸다.

    낭독공연이라는 형식마저도 공연의 내용을 전달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배우들의 동선과 움직임이 제한되는 만큼 자칫 지루할 수도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배우들의 동선을 더욱 제약함으로써 통조림과 같은 가공된 세계에 갇혀 ‘소녀다움’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연출 덕에 집 안에 공허하게 널브러진 머루를 뒤로 한 채 홀로 집을 나설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무대를 떠나는 오디의 행동이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통조림처럼 취약하게 멸균된 세계를 지탱하기 위해 대상화되는 《양질의 단백질》의 이야기는 계층과 빈곤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이 작품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키치’라는 단어는 ‘싸구려’라는 뜻을 가진다. 통조림은 ‘키치’한 음식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가격도 저렴하고, 보존기간도 길어 아깝게 버릴 일도 없어 농수산물과 같은 신선식품을 대체하는 용도로 활용된다.

    그래서 통조림과 같은 가공식품을 어린 자녀에게 먹이는 일은 ‘이기적인 엄마’의 표상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신선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일 수 있는 것은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 식의 표본에 가깝다. 신선식품을 구입하는 것에 대한 경제적 부담에 짓눌려,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식사준비의 시간조차 확보하지 못하는 빈곤층에게는 꿈같은 일이다. 햄공장에서 일하며 자녀들에게 햄을 먹일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모습 또한 ‘모성’에 대한 요구와 빈곤의 충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머루와 오디를 옥죄었던 ‘아름다운 신체’에 대한 열망도 다분히 중산층적이다. 건강한 식단조절과 피트니스, 영양제 섭취와 같이 상당한 경제적·시간적 소비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여성의 신체에 대한 대상화는 계층을 가리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저소득층 여성은 비용이 들지 않은 절식과 같은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하고, 식이장애를 비롯한 건강의 위협까지 감수한다. 마치 머루와 오디가 그러했듯이.


    《양질의 단백질》은 불쾌하고도 발랄하게, 통조림 속에 갇힌 세계를 폭로한다. 너무도 완전해 보이는 나머지 누군가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지만, 분명히 내재하고 있는 모순을 무대 위에 드러낸다. 통조림 속에 갇힌 세계의 뚜껑을 딴 후 그것이 변질되어 부패에 이르는 과정을 오롯이 말이다.

    오랜 기간 누적되어 온 이상적인 ‘소녀다움’ 혹은 ‘여성다움’에 대한 강박은 수많은 여성들을 옥죄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폭력을 지적하며 저항하는 움직임은 ‘갈등과 불화의 원인’이라 치부된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세계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안정적이라 느끼는 세계가 실은 통조림과 같이 멸균되어 더 취약한 세계는 아닌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악한 존재’가 세상을 위태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작은 균열에도 부패가 시작될 만큼 취약하게 유지되어 온 세계였던 것은 아닐지 말이다.



*초대권을 제공받아 관람한 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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