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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way of seeing Mar 14. 2024

편향 :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결'은 어디서 왔을까?

나는 합리적인가, 내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

글을 쓰다 보면, 글 쓰는 자신에게 자신이 없을 때가 있다. 

무릇 그럴 때는 잠시 멈춰 서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지금에 닿아있는 생각들을 가볍게 공유해 본다. 


이 이야기는 대략 4년 전에 시작되었다. 

한창 '열정'이 넘쳐 연구를 잘하고도, 열심히 하고도 싶었던 석사 마지막학기 시절,

나는 내 연구가 세상의 공리에 대한 완역한 해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떤 작은 반향은 일으킬 만큼의 결과이길 소망했었다. 


7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가깝고도 먼 '자연'에 대해 닥치는 대로 물으며 다녔고,

아침 7시에 일어나 정신없이 알바를 뛰어가던 주말에도 알바가 끝나는 3시면 어김없이 서울의 공원들로 종행무진 향하며 공원에서 걷고, 먹고, 뛰는 200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 당시 나의 질문은 지금 생각해 보면, 맥락도 없이 낭만적이었다.


'세상의 자연스러움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곳에서 자연스러움을 느끼나요?'


난생처음 보는 것만 같은, 돈도 인간관계도 성공도 아닌, 자연(自然, 영어: Nature, 그리스어: physis)에 대한 질문은 당황스럽기도 한 물음이었지만 만나는 누구, 모든 이의 마음속에 '자연'에 대한 정의가 있었다. 

그렇게, 한 네 달 정도를 정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 찾아가다 보니, 각자의 마음속 이미지에 특정한 '결 / taste / 好この'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결'의 방향성을 찾아서, 논문을 써내리라. 나는 다짐했다.


그렇게, '주관성(Subjective)'을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취향 존중의 시대'를 맞아, 모두의 의견을 듣고, 적고, 취합하는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주관성에 대한 연구라면 그 대상이 아무리 똑똑한 교수진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 개인의 주관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스쳐 지나갔고 그 핑계로 많은 '선배님', '선생님'을 만나고, 그들의 사적인 자연 취향을 취조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논현역 페스트파이브에서, 나의 뇌리를 관통하는 한 질문을 받게 된다.

평소 '날카로운 평가자'로 소문난 선생님께서 나를 보고 그저 신기한 듯 웃으며, 내 연구 시트를 채워주면서(아무런 악의도 없는 듯이, 조금은 호기로운 어조 또는- 호기심을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내가 찾고 있는 이 '생각의 결'이 사실은 연구의 bias가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나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 차이를 발견하는 연구라고 둘러대고 조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날 학교로 다시 돌아오는 길부터 지금까지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아직도 그 질문에 답을 찾아가고 있다. 


보통의 연구에서는 '편향'의 최소화를 목표로 한다. 과학과 공학에서 편향은 체계적인 오류로 정의되기 때문에, 통계적 편향의 최소화는 연구설계의 기본이자 연구자들의 불문율이다. 


편향(한자: 偏向, 영어: bias)이란
어떤 생각 또는 사물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불균형한 가중치로 사전적 의미로는 '한쪽으로 치우침'이다. 편향은 선천적이거나 학습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은 개인, 집단, 또는 신념에 대한 편향 또는 반대 편향을 발달시킬 수 있다. 과학과 공학에서 편향은 체계적인 오류이다. 통계적 편향은 모집단의 불공정한 표본 추출이나 평균적으로 정확한 결과를 주지 않는 추정 과정에서 비롯된다.


 'bias'의 어원은 '기울기'이다. 즉, 어디로 치우쳐져 있는지에 대한 정도를 의미한다. 

그 편향은 '한 꼭짓점'이 나아가는 각도를 의미하기에, '취향:필연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에 닿아있다. 편향의 존재는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라는 전제를 흔들기 때문에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편향은 존재한다. 


2002년 미국 프리스턴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 박사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올해 90세인 카너먼은 자신의 책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인간의 사고에 두 가지 시스템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편리함을 추구하는 '편향과 휴리스틱스적 사고'를 이야기했다. 


즉,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 '편향과 주먹구구식 사고'로 가득한 존재이며,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측면에서 그러한 특징들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연구로 밝혀진 편향은 무려 101개(75개의 개인적/내면적 편향, 21개의 사회적 편향, 49개의 기억의 오류 총 145개 중 대표적인 것)나 정리되어 있다.


사람은 매 순간 행동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고'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판단'을 내리게 된다. 

당시의 생각과 판단의 결과로 우리는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이 모여 더 심화된 '결'을 만드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이중인지(Dual Process)에 따라 판단을 결정하게 되는데, 그중 첫 번째가 감성과 직관을 중시하는 제1 체계인 '직관(直觀, 영어: intuition)'이며, 두 번째는 '이성적 추리(rational thinking)'이다. 


제1 체계인 직관은 경험이 모여, '그렇게 될 것만 같은 결'을 이미 예상하고 자동으로 결정을 활성화하는 빠른 인지 과정이다
제2 체계인 이성은 의식적인 추론의 과정으로, '어떠한 척도와 기준을 두고 분별력을 토대로 참·거짓, 선·악 따위를 판단하는 능력'으로 직관에 비해 느리고, 논리적 사고를 요한다. 



직관은 '휴리스틱(heuristics) '에 지배를 받는다. 

여기에서 휴리스틱(heuristics) 또는 발견법(發見法)이란 불충분한 시간이나 정보로 인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거나, 체계적이면서 합리적인 판단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빠르게 사용할 수 있게 보다 용이하게 구성된 간편 추론의 방법을 의미한다. 현대 심리학에서 휴리스틱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춘 직관 및 감성에 따른 시행착오적 지식을 의미한다(인지편향사전, 이남석). 


대표적인 편향으로는, 어떤 질문을 했을 때, 쉽게 머릿속에 떠오르거나 기억할 수 있는 정보에 기반하여, 사건의 발생확률이 더 높은 것이라고 추정하는 '가용성 휴리스틱' ; 자주 보는 대상에 대해 친숙도가 쌓이는 만큼 더 큰 호감을 느끼는 '친숙도의 원리'; 개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아놓고 비교하니 사소한 차이도 크게 달라 보이는 '구별 편향, 대조효과' 등 일상의 모든 곳에 편향이 존재한다. 


과거 나의 질문에서, 서로 다른 장소의 다양한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도, 앞서 제시한 다양한 편향이 그들의 대답에 묻어 나왔을 것이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서, 생활권 반경에 위치해서 '확신 있게 대답했'을지도.

내가 많이 방문한 공원이어서, SNS에서 많은 광고를 보아서 더 익숙할수록 '더 좋다'라고 판단했을지도.

여러 공원의 특징을 두고 물어보니, 그중 어떤 하나의 차이도 크게 보았을지도. 


많은 휴리스틱이 인지 편향을 야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적이지 않은 판단으로 생각되기 쉬운 '편향'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뇌는 머릿속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기를 귀찮아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체화된 정보는 '직관'의 영역으로 논증 없이 결론지어 버릴 수 있다. 다시 말해, 내 뇌가 만들어놓은 지름길의 방향이 편향의 방향인 것이다. 지금껏 살아온 날들, 그리고 지금의 선택에 의해 방향과 길이를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편향'의 존재는 아닐 것이다. 

경계해야 하는 것은, 편향을 만들어내는 '정보'와 '논리적 추론'의 타당성이다.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을 소홀히 할수록 뇌는 쉬운 결론을 내리고, 생각의 길은 닫히게 된다. 편향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순간, 어떤 확신에 찬 주장은 잦아든다.


과연, 내가 아는 것은 전부인가? 내가 보지 못하거나 듣지 못했던 정보는 없는가? 내가 보는 만큼만 판단해도 되는 것인가? 



이런 의문은 주장을 펼치고, 단정 짓는 습관에 제동을 걸어준다. 

결코, 틀린 것은 없으며 생각의 전제도 다 같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겸손함을 마주한다.


지금,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결'은 어디서 왔을까? 어떤 삶의 순간이 내면의 편향을 만들어냈을까?

나는 사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우리가 어떤 확신에 차 있다면, 혹여나 그것은 한 면만 보고자 하는 나의 게으름은 아니었는가?


겸손한 마음으로 반추해 본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결은 어디에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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