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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 May 24. 2023

벚꽃을 따는 참새의 사정

-독서하지 않는 그대


벚꽃이 흐드러진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산책을 즐기던 중, 꽃봉오리가 송이째로 떨어지는 벚나무 아래를 지났다. 나무 위를 올려다보니, 직박구리와 참새 대여섯 마리가 한 그루의 벚나무 위에서 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  


프로펠러처럼 뱅글뱅글 돌아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꽃송이를 잡던 아이가, 새가 장난으로 꽃을 떨어뜨리는 거냐고 물었다. 사실 새들은 꿀을 먹는 중이다.


잡식성으로 알려진 새들의 먹이로 우리는 곡식이나 벌레 등을 떠올린다. 새들은 먹을 것이 마땅치 않을 때는 꽃의 꿀을 먹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먹잇감이 풍성하지 않은 도시에 사는 새들에게서 이런 모습이 자주 보인다.  


벚꽃을 따는 범인의 정체는 참새다. 직박구리의 부리는 가늘고 긴 반면, 참새의 부리는 짧고 뭉툭하다. 그래서 직박구리처럼 꽃송이에 부리를 넣어 얌전하게 꿀을 먹을 수 없는 참새는 꽃의 꿀샘 아래를 부리로 자르고 잘라낸 꽃의 뒷부분을 물어 꿀을 섭취한다. 맛있게 꿀을 먹고 난 뒤 꽃은 나무 아래로 패대기치니, 참새가 꿀을 먹는 광경은 직박구리의 것보다 꽤 스펙터클 하다. 격렬하게 꿀을 먹는 참새를 보고 있자니 얼마 전 지인과 나눈 아이들의 독서에 대한 담소가 생각났다.   


지인은 아이들 앞에서는 꼭 책 읽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쓴다고 했다. 이것은 책을 읽는 행위와는 구별이 필요한데, 말 그대로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 목적으로 대부분의 경우는 읽는 척을 하며 소파에 앉아있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한술 더 떠 남편은 책을 읽는 척하는 것도 힘들다며 책 사이에 핸드폰을 끼워두고 침묵 속 유튜브 시청을 한다고 한다. 이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이해되는 것은 부모가 독서하는 모습을 보이면 즉 독서 환경을 조성하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책을 좋아하게 된다는 꽤 익숙한 이론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글쎄... 나는 좀 회의적이다. 나의 판단에는 '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빈약한 근거가 작용하는데, 역설적으로 '나의 경우'라는 가정하엔 이만큼 정확한 것도 없다. 독서를 즐기는 우리 부부가 낳고 키운 아이들은 독서를 즐기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아주 꾸준하고 자연스럽게 독서하는 환경에 노출되었지만, 그것이 아이들의 독서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혹시 혼자만 열심히 읽은 것은 아니냐고?


아이들이 어렸을 적엔 나 또한 여느 엄마들처럼 여우주연상 뺨치는 연기를 펼쳐가며 혼신의 힘을 다해 책을 읽어주었다. 이곳이 나를 위한 마지막 무대인 듯, 원숭이가 되고 토끼가 되고 마녀가 됐다. 관객들의 반응은 또 어땠던가! 열광적이다 못해 병적일 정도로 열렬한 커튼콜에 무대는 막을 내리지 못하고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열성적인 노력의 끝에 해피엔딩은 없었다. 이것은 책 읽기에 대한 잔혹동화다.  


내가 책을 가까이하는 이유는 책이 나의 삶을 확장해 주는 쉽고 재밌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행위는 나에게 즐거움인 동시에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데 필요한 아주 유용하고 편리한 기술이다. 그런데 나의 아이에게도 그럴까?


아이는 나와 다른 방식으로 일용할 양식을 섭취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 방식은 유튜브, 대중매체, 자신만의 놀이, 나무위키, 학교, 가족, 약간의 책으로 요약되는데 가장 거대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유튜브이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나는 옳고, 유튜브를 보는 아이들은 문제가 있는 걸까?


아이들은 자기들이 보는 수많은 영상 중 오픈하고 싶은(혹은 오픈 가능한) 영상만 나에게 공유하는데, 그것들의 교집합을 구해보면 아이의 관심사와 취향이 보인다. 나는 그 과정이 꽤 흥미롭다. 왜냐하면 아이의 특성이 담긴 영상들을 보면서 아이는 나와 정말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아이가 내가 걱정하는 것만큼 자극적인 영상만을 쫓아보는 건 아니라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획일화된 시선으로 보면 아이들의 방식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들어맞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틀 밖으로 벗어나면 잘라내어 버리거나, 튀어나온 부분은 두드려 맞춰 집어넣으려는 부모가 되고 싶지 않다. 다만, 독서하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나로서는 내가 맛본 세상의 기쁨도 아이들과 공유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함께 책 읽는 시간을 가지자고 제안했다. 꼭 함께 읽어야 하냐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는 아이들에게 나는 역지사지의 기술을 좀 썼다. 나는 온라인 게임을 좋아하지 않지만, 때때로 아이들과 함께 온라인 게임을 한다. 함께하는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다는 아이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시작된 것인데 아직까진 게임 자체가 가진 재미를 모르겠다. 그래도 자기들이 좋아하는 게임을 엄마와 함께하려는 마음이 기특해 가끔은 노쇠한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조이스틱을 잡는다.  


온라인 게임의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어몽어스를 함께 하다 낯선 유저가 나를 범인으로 몰아가며 쌍욕(아이들 앞에서 듣는 내 엄마에 대한 욕은 꽤 아찔했다.)을 퍼부은 적도 있고, 시야 전환이 심한 마인크래프트를 하느라 방구석 멀미를 경험하기도 했다. 발디선생님의 도발을 피하는 것도, 도무지 귀여운 구석을 찾아보기 힘든 이빨쟁이 허기워기를 피해 어두운 통로를 달아나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순간순간 즐거웠다.  


아이들은 모자란 엄마가 어이없이 죽지 않도록 가르치고 보호하는 동시에 멀쩡한 두 사람의 몫을 해내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각자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자연스레 알게 됐다. 단서를 찾고 미션을 해결하는 게임을 함께 할 때, 모자라기만 했던 엄마는 노련한 동지로 변모했고 그렇게 서로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책을 같이 읽고 싶은 마음은 엄마와 온라인 게임을 함께 하고 싶어 했던 너희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책은 엄마가 아주 좋아하는 오락 같은 것인데 나 혼자만 즐기기엔 아깝고 아쉽다고. 너희 나이에 엄마가 읽었던 책의 주인공들을 너희도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못 되는 것은 아니지만, 책이 주는 재미를 너희도 나와 함께 알아갔으면 좋겠다고.


자신들의 권유에 싫어하는 온라인 게임에 몸을 던진 엄마의 도전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일종의 부채감을 느꼈는지 의외로 순순히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함께 책을 읽는다. 주로 한 시간 내에 독파가 가능한 아주 얇은 고전들을 읽는데, 각자 다른 책을 읽고 짧게라도 서로에게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시간을 꼭 갖는다. 10분 이상은 떠들 수 없도록 벌금을 부과하며 철저하게 관리하다 보니, 책을 함께 나누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두 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간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이 시간을 별로 반기지 않는다. 이것은 아직도 온라인 게임을 그리 반기지 않는 나의 마음과 같은 것이니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아이는 모비 딕을 읽은 뒤, 우영우가 향유고래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겠다고 말했다. 정말 멋진 고래라고. 우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은 뒤, 이 동화를 콘셉트로 만든 아이유의 스물셋 뮤직비디오를 함께 보며 첼시 고양이에 관해 이야기했다. 장끼전에서 초상집에 조문을 와 홀로 된 까투리에게 수작을 거는 잡새들의 기막힌 플러팅을 구경하며 서로의 배꼽을 잡기도 했다. 돈키호테와 지킬 앤 하이드가 근사한 뮤지컬로 재탄생했을 때, 우리의 눈과 귀가 어떤 환희를 맛볼 수 있는지도 목격했다. 그렇게 우리들은 순간순간 즐거웠다.  


책이 책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듯, 유튜브가 유튜브에만 머무르는 것도 아닐 것이다. 책이든 유튜브이든 또는 그 밖의 무엇이든, 분명 우리의 삶과 맞닿은 확장성을 가진 부분들이 있다. 나는 아이들이 그 지점을 찾아내고, 거기에서 오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아이들로 성장하길 바란다.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말에 동감한다. 하지만 조바심을 내려놓고, 그 수단이라는 틀에 좀 더 아량을 베풀 필요가 있다.  


한껏 개방적인 시선으로 이해심을 발휘한 듯 보이지만, 지금도 유튜브를 끼니처럼 꼬박꼬박 챙겨보는 아이들을 보면, 정제된 탄수화물이 가득한 패스트푸드로 몸을 키우는 건 아닌지 걱정될 때가 있다. 그럴 땐 또 어쩌겠는가? 이것도 한번 먹어보라고 때때로 자연식을 들이밀 수밖에.  


직박구리도 참새도 어쨌든 달콤한 꿀을 먹는다. 아이와 내가 각자의 방식으로 삶에 필요한 것들을 쌓아가는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긴 부리를 이용해 우아하게 꿀을 먹는 직박구리 옆에 당차게 꽃을 분질러가며 꿀을 먹는 참새가 있다. 이들의 방식은 아주 다르지만, 자연의 세계에서 누구의 방법이 더 뛰어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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