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남캐 Jul 08. 2022

헤세의 문장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베아트리체, 당신이라는 세계

 

 베아트리체와 단 한마디도 말을 나눈 적은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시 나에게 지극히 깊은 영향을 주었다. 자신의 영상을 내 앞에 내세워 보여 준 것이다. 나에게 성소를 열어주었다. 나를 사원안의 기도자로 만들었다. 그 날로 나는 술집 출입과 밤에 나돌아 다니는 일로부터 멀어졌다. 나는 다시 혼자 있을 수 있었다. 다시 책을 즐겨 읽고 즐겨 산책했다.

...이제 나는 무언가를 사랑하고 숭배해야 했다. 다시 하나의 이상을 가졌던 것이다. 삶은 다시 예감과 비밀에 찬 영롱한 여명이었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비가 온 세상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는 가운데, 헤세의 문장에서 문득 당신을 보았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여전히 사랑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나는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실연의 아픔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나에게 하나의 영감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했던 일이, 내 얼마 남지 않은 젊음에서 무척 소중한 사건이었음은 앞으로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을 가끔 떠올리고 마는 일들을, 그리고 그것을 문장으로 적고 마는 일들을 부디 너른 마음으로 용서해주길 바랍니다. 진실로 당신은 나에게 베아트리체였습니다.








 한때 당신은 나의 이상향이었습니다. 건강함, 아름다움, 환함, 진실함 따위의 가치들이 당신이라는 존재 안에 완벽히 갖춰져 있는 듯했습니다. 나의 추레한 현실과는 한참 거리가 먼 단어들이었습니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 갖고 싶은 것들, 언젠가 마땅히 가져야만 한다고 믿지만 손에 닿지 않는 것들. 그런 내면의 결핍들을, 사랑했던 당신께 무심코 투영해버리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 투영의 과정이 무척 고요하고 건강했다는 사실을요. 신격화를 통한 집착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오히려 부지런히 길을 걸어 나아가는 순례자가 되어갔습니다. 당신 앞에서 불필요한 언동을 줄이고 오직 나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만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책을 읽고 글을 썼습니다. 밤이 되면 자주 산책했습니다. 그러다가 무심결에 당신이 떠오르게 되기라도 하면 애써 떨쳐내려 노력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이전에, 우선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편지에서 밝힌 대로 당신은 나에게 가보지 못한 하나의 세계였습니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당신이라는 세계를 꿈꾸는 일이었습니다. 마치 프랑스를 밟아보지 않고 온갖 예술가들이 파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상상하듯이, 알프스의 설원을 밟아보지 않고 그 위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금발의 소녀들을 상상하듯이 말입니다. 그 모습들이 비록 과장되었거나 미화되었어도, 때로는 그런 낙천적인 환상들이 꿈을 향해 나아가게 해주는 강력한 동기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바라던 땅으로 기어코 떠나리라 결심하게 만듭니다. 비행기 값을 마련하기 위해 부지런히 저축하고, 그 세계에 대한 각종 서적들을 탐독하게 되며, 필요한 물건들을 마련하고 단단히 짐을 꾸리게 만듭니다. 그렇게 떠난 세계의 현실이 막상 꿈꾸던 모습과 거리가 멀다고 해서, 그 여행의 의미 자체가 송두리째로 퇴색된다거나 불행한 사건으로 남는다는 이야기를 나는 단 한차례도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사랑이, 그 생생한 현장에서 발견되고 솟아나게 되기도 합니다. 꺼림칙한 문화적 차이와 터무니없이 부실한 편의시설들이, 기대와는 달리 수수한 차림새를 한 사람들의 모습이, 부지불식간에 발목을 잡는 자질구레한 사건사고들이 우리의 꿈을 여러 차례 배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떠난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역경을 무릅쓰고 꿈꾸던 세계를 향해 떠나서 실망해보는 일이, 두려움으로 떠나지 못한 채 이미 떠나본 자들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일보다 훨씬 가치 있음을 나는 믿습니다. 미쉐린 3성급의 레스토랑보다 이름 모를 시장의 빵 한 조각에서, 명품을 주렁주렁 매단 파리지앵들보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집 아주머니의 작은 친절에서, 먼 타지에서도 별 다를 것 없는 아이들의 무구함에서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을 어김없이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한차례 당신을 향해 떠나보았음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비록 짧은 여행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아주 조금이나마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웃으며 나를 돌려보내 준 당신께 아직까지도 한량없는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한때 지고한 '베아트리체'의 모습으로 내 안에 걸려있던 사랑은, 이젠 단지 친절하고 건강한 미소의 '당신'으로만 선명하게 살아있을 따름입니다.






 나는 이제 나에게 떠나는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모든 시작에 당신이 있었음을 마지막으로 되새겨봅니다. 닿지 않을 감사를 빗속에서 전합니다. 어쩐지 장마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이 세찬 비가 무사히 지나치길 바랍니다. 당신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작가의 이전글 매일 아침 이불 정리하고 환기해 보았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