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 달리기가 점점 내 삶의 일부분으로 정착해가고 있는 중이다. 주 3일은 꼭 시간을 내서 달리고 있다. 휴일에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퇴근하고 나서 라도 뛴다. 놀랍게도 하기 싫어서 끙끙대며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물론 간혹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괴롭진 않다. 글감을 고민하는 일보다는 훨씬 덜 괴롭다.) 오히려 뛰는 일이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나간다. '시간을 내서 남들이 기피하는 유산소 운동을 해낸다'라는 만족감보다는, 다만 '뛰고 싶다'라는 순수한 열망이 나를 밖으로 나가게 만든다. 대단히 진취적인 노력을 한다기보다 그저 이 운동의 방식이 내게 맞춤복처럼 꼭 맞을 뿐이다. 나는 뛰는 것이 좋다.
컨디션에 따라 뛰는 일이 버거운 날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청량감을 느낀다. 마치 목마름이나 가려움을 해소하는 듯한 느낌과 비슷하다. 그것은 분명 내면세계의 결핍들일 것이다. 서른이 다 되었는데도 멀게만 느껴지는 어른의 삶, 언제나 달아나기만 하는 사랑,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엄습해오는 불안, 한없이 가볍게만 느껴지는 내 영혼의 무게. 글쓰기도 이런 결핍들을 해소하는데 분명 도움을 주지만, 달리기처럼 매번 청량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러닝은 디테일한 깨달음을 주진 않으나 원초적인 해방감을 선사한다. 내 두 다리가 어디에도 묶여있지 않음을 달리는 매 순간 실감한다. 달리면 달릴수록 자유로워진다.
글은 써지지 않으면 괴롭다. 그러나 러닝에는 달려지지 않는 일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프지 않거나,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된다. 대단한 실력이 없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기록을 세우기 위해서 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잡한 생각 없이, 그냥 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의 처지엔 이보다 더 좋은 취미가 있을 수 없었다. 서른을 앞둔 내게 그것을 단지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일들은 이제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글도, 일도, 재테크도, 인간관계도 단지 '하기만 하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잘 해내야 했다. 당장은 서툴어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잘하게 되어야만 했다. 나는 그런 마음의 강박을 지닌 채로 돌아오는 일상을 꾸역꾸역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발에 치이는 감정들 태반이 모날 대로 모난 죄책감이었다.
"청춘이 매 하루씩 멀어지고 있는데, 넌 아직까지도 제자리걸음이야? 평생 아마추어인 채로 살아가려고? 낭비한 20대를 만회하고 싶다면서, 이렇게 손톱만큼씩 아장아장 걸어서 어느 세월에 꿈과 만날래?"
손톱만큼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나는 성장하고 있노라고 스스로에게 가열차게 항변하고 싶지만 끝내는 목이 메고 만다. 그렇기에 나는 보란 듯이 뛴다. 나조차도 아직 내가 믿어지지 않기에 뛴다. 손톱만큼의 걸음으로는 아득한 꿈이 더욱 아득해지기에, 밤을 가르며 뛴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서 30분을 채우고 나면, 왠지 모르게 어두웠던 미래의 장막이 조금은 걷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죄책감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 힘을 잃어 있다. 한차례의 러닝을 마친 것만으로도, 나는 무언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후 나머지 일상을 살아낸다. 책을 읽고 반드시 몇 줄인가의 글을 써낸다. 성취의 감각을 유지한 채로, 마치 남은 코스를 의연하게 완주하듯 하루를 마무리한다.
문학계의 거장인 동시에열정적 러너이기도 한 무라카미 하루키는,러닝에 대해 "글쓰기의 메타포"라는 표현을 썼다. 나에게도 거의 마찬가지만세부적으로는 약간 다르다. 나에게 러닝이란 "더 나은 삶에 대한 메타포"다. 자기 신뢰가 충분히 쌓이지 않은 풋내기 작가에겐, 삶을 살아가는 방식 또한 글쓰기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단지 드문드문 내킬 때만 그렇게 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구체적인 방법론을 고민하고, 지속적으로 실천해나가야 한다. 나는 바로 그런 삶의 지속성을 달리는 매 순간 은유하는 것이다. 그렇게 은유한 힘으로, 다가오는 미래들을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