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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남캐 Aug 01. 2022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일까?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이다.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p.44






 “자신을 얼마나 줄 수 있는가”를 부의 척도로 삼는다면 나는 과연 어디쯤에 해당될까. 아마 차상위계층쯤 되지 않을까 싶다. 중산층은 터무니없이 멀다. 나는 소위 ‘착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청년이었지만 결코 ‘헌신적인 사람’은 못되었다. 나는 지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었다. 내게 정신적&물질적으로 타격이 없는 시점에서만, 그리고 누군가를 지독히도 사랑하게 되었을 때에만. 


 위 두 가지 경우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는 정도의 ‘내어줌’이다. 저자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자기 자신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어주기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부자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그러나 단지 간헐적인 한 두 차례의 도움만으로 ‘부자’라는 타이틀을 얻는 것은 아무래도 낯부끄럽다. 나의 냉엄한 현실에 손톱만큼도 근접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저명한 학자나 지도자의 이상론으로 가볍게 자위하기보다, 나는 다만 그런 ‘내어줌’을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싶을 따름이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나와 언젠가 만나게 될 좋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헌신을 이어가고 싶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서 라기보다, 오히려 그런 헌신들이 내게 주는 정서적 기쁨이 무척 깊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한 박스의 사과를 매달 보내는 일, 친구의 고민에 한 번쯤은 밤새 귀를 기울여주는 일, 동료의 퇴근시간을 생각해주는 일. 그리고 최대한 운영이 투명한 기부단체를 알아보고 어떤 형태의 기부를 실행할지 (아동결연을 염두에 두고 있다) 고민해보는 일. 






 내가 기쁘지 않다면 내어줄 일도 없다. 나의 삶이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내어줄 때, 나는 기쁘다. 무의미하던 하루에 의미가 생겨난다. 만약 삶에 구체적 의미가 있을 리 없다면, 차라리 의미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속고 살기라도 하고 싶을 따름이다. 타인에 대한 공헌이 그런 착각을 선사한다면 나는 기꺼이 공헌하겠다. 그러다 보면 부자는 못되더라도 차상위계층에서는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남 도울 줄 모르는 냉혈한’이라는 평가는 평생 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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