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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수현 Dec 27. 2023

냉소주의를 뛰어넘는 세 가지 방법





        사람은 하루에도 수만 가지 생각을 합니다. 그중 80퍼센트는 부정적인 것이라 하지요.* 생각이 많으면 우울해진다면 속설이 과학적 근거가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 작가는 생각이 많은 족속입니다. 그래서 우울감에 시달리는 작가가 그리도 많은 것 같습니다.


        작가에게 냉소주의는 끊기 힘든 독약과 같습니다. 그것을 들이켜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머리가 둔해지는 걸 알지만 흡입을 멈추기가 어렵습니다. 냉소주의가 건네는 무거운 질문과 불타오르는 복수심이 내심 즐겁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나도 냉소주의에 적잖이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요 근래 한번 진지하게 각을 잡고 통계를 내보았는데, 대략 두 문장에 한 번 꼴로 냉소주의가 발현되더군요. 그래서 그렇게나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짧은 글 한편을 쓰는 데에도 수십, 수백 번의 냉소주의를 받아내야 하니 괴로울 수밖에요.


냉소주의라는 장애물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출처: ChatGPT4)


        여기 1미터 남짓한 장애물이 하나 있습니다. 이 장애물을 넘어가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높이 뛰어 위로 넘어가거나, 허리를 숙여 아래로 기어가거나, 조금 비껴서 옆으로 돌아가거나, 이렇게 셋입니다. 우리가 냉소주의를 넘어내는 방법도 위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냉소적 질문을 그냥 무시해 버릴 수도 있고, 허리를 숙여 기어갈 수도 있고, 옆으로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냉소주의를 돌파하는 첫 번째 방법은, 그것을 그냥 무시하는 것입니다. 냉소주의는 애당초 논증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냥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분명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이 단순 명료한 방식의 혜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 방식의 큰 단점입니다.) 타고나길 단순하고 명랑한 사람은 위 방식이 숨을 쉬듯 자연스럽겠지만, 그러지 못한 부류에게는 너무 뻔뻔스럽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냉소주의를 감당하는 두 번째 방법은, 허리를 숙여 기어들어가는 방식입니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이 방식을 가장 즐겨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냉소주의의 공격을 받아들이되 앞으로는 가야겠으니 모종의 타협을 하는 것이지요. 이 방법 역시 장단점이 뚜렷합니다. 성공적으로 타협이 이루어지면 제법 그럴싸한 작품이 나옵니다. 적절한 우울감과 적절한 진솔함이 섞여서 내 안의 냉소주의를 자극하지 않는 무난한 글이 나옵니다. 누구도 자극하지 않는 유(柔)한 글이 나옵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게 무척 괴롭고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냉소주의를 온전히 갈무리하지 않은 고로, 글을 쓰는 내내 작가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또 듣기 싫은 자조적 고해성사가 쓸데없이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냉소주의를 넘어내는 마지막 방법은, 옆으로 돌아가는 방식입니다. 동일한 사물에 새로운 스토리를 부여하는 방식입니다. 앞서 말한 바, 냉소주의는 논증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모른 체하기도 어렵지요. 마음이 순수한 부류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때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스스로에게 제시하면  진퇴양난을 좀 더 수월하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네가 무슨 경험을 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딴 글을 쓸 거라면 그냥 발 닦고 잠이나 더 자라.’



        이번 글을 작성하면서도 수십 번 냉소주의를 넘어야 했습니다. 이 글 본래 < 요 근래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로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온점을 찍자마자 어김없이 냉소주의가 찾아오더군요. 반박할 수 없는 공격이었에 또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세 가지 옵션이 있었습니다. 냉소주의를 무시할 것인가, 허리를 숙이고 기어갈 것인가, 옆으로 비껴갈 것인가.


        새로운 스토리를 부여하는 방식은 냉소주의로부터 도망는 게 아닙니다.  동일한 사물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함을 인식하는 것 뿐입니다. 냉소주의 공격에 정면으로 맞대응하는 게 아니라, 눈과 귀를 막고 울부짖는 스스로를 달래는 마음으로, 마치 스스로에게 우문현답(愚問賢答)을 건네는 마음으로 냉소주의를 갈무리하는 것입니다.



    ‘데일 카네기는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가 원하는 걸 주는 것이라고. 상대가 지닌 중요한 사람이 되고픈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상대는 무엇이 궁금할까. 이 글이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여부가 궁금하지 않을까? 오수현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라는 걸 확인을 받고 싶지 않을까?’



        그렇게 이번 서문을 완성하였습니다. 물론 완벽한 서문과는 거리가 멉니다. 또 혹자 중에는 예전 버전이 더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만족합니다. 스스로 던진 냉소주의를 잘 갈무리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게 너무 괴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질문 던지고 만 것 아니라, 실제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출처: ChatGPT4


        독(毒)은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약(藥)이 되기도 합니다. 냉소주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냉소주의는 창조하는 힘을 짓누르는 독과 같지만, 그 안에 담긴 본질적 순수함과 끊임없는 자기 절제는 영약 제조를 위한 훌륭한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순수함이 냉소주의로 변질되지 않기를, 그리하여 당신 안의 창조하는 힘이 언제고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같은 마음으로 소망합니다.   





(*출처: 미국 국립과학재단 National Science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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