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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수현 Oct 10. 2024

글짓는 밤



1.


첫 책을 내고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그새 많은 일이 있었다. 특히 지난 6월부터 9월까지는 민법 강의 준비에 온 힘을 쏟았다. 오래전부터 가르치는 업을 마음 한편에 품고 살았는데, 민법책의 예상외 성공이 계기가 되어 큰맘 먹고 사무실을 정리한 것이다. 이후 여기저기 지원을 하다가 어느 고시학원과 연이 닿았고 그곳에서 강사 커리어를 시작하기로 했다.


밤새 교재 작업을 해도 피곤한 줄 몰랐다. 준비해야 할 게 많았지만 매 순간 보람이 있었고, 오랜만에 기대로 충만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토록 충만했던 마음이 그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학원 홈페이지에 로그인하여 수강생 수를 처음으로 확인해 보았는데 그 숫자가 처참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현장 강의 단 한 명, 온라인 강의 단 두 명. 이것이 지난 넉 달을 정신 없이 보낸 나에게 주어진 성적표였다. 10월 정산 금액으로 찍힌 “9,850원”이라는 숫자는 나를 두 번 죽이는 것만 같았다.


결국 어제 현장 강의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세 시간 동안 텅 빈 강의실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며 강의를 진행해야 했다. 언제나 할 말이 많은 편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역시나 대화 상대가 있을 때 이야기고, 허공을 응시하며 혼자 떠들려니 시시각각 진이 빠졌다.


가슴팍 뱃지를 떼고 나니까 온실 밖 세상에서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돌아오는 길 초가을 저녁 바람마저 유달리 매섭다.    



2.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5년짜리 전속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다른 곳에 취업할 수도 없다. 또 이왕 시작한 것 끝장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가르치는 일 자체는 적성에 맞는 듯하다. 아직 많은 학생을 만나보진 않았지만 지금껏 만나본 학생들은 반응이 좋았고, 무엇보다 스스로가 큰 보람을 느낀다. 수업 내용도 자부한다. 자신 있으니까, 어떻게든 버티다 보면 길이 보이겠지.


문득 민법책을 마무리하며 고생하던 어느 새벽 밤하늘이 떠오른다. 대충 아무 신발이나 신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뛴 게 아까워서 내리 세 정거장을 더 달렸다. 나중에 보니 총 15킬로 정도를 뛰었더랬다. 그날 한강변에서 나를 본 사람들은 뭐라 생각했을까. 뛰면서 무슨 혼잣말을 저리 할까 신기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포기할 거야? 지금 포기할 거냐고. 그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지.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뼈가 으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완주한다.'



3.


모든 일엔 다 양면이 있다고, 현 상황이 마냥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다시금 글 생각이 절로 난다. 지금 돌이켜보니 첫 번째 책의 큰 성공이 작가로서는 되레 독이었다. 안 그래도 자기검열이 심한 편이었는데 예전보다 그 수위가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더 좋은 글, 더 멋진 글, 더 탁월한 글을 쓰라고 스스로를 재촉했고, 조금이라도 기준에서 미달하면 아주 손을 놓아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코뼈가 한번 시원하게 꺾이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편하다.


마음속 화자의 모습이 예전과 사뭇 다르다. 요 직전까지는 어느 골방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짜며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본인은 이토록 성실히 삶을 대하고 있으나 상이 자신을 몰라준다며 괴로워하는 어느 젊은 베르테르가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이번에 자리 잡은 아저씨는 어딘가 모를 푸근한 느낌이 있다. 약간 어리숙해 보이는 그는 대신 목덜미를 긁적이며 '그게, 좀 그렇게 됐네'라고 멋쩍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었다.



4.


그게, 좀 그렇게 됐네. 뭐, 어쩌겠어. 이왕 시작한 거 끝장을 봐야지.


조금만 더 버텨보자. 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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