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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수진 Jul 07. 2020

후퇴할 수 없는 이들의 쾌속 질주

앞만 보고 달릴 수밖에 없었던, <델마와 루이스>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의 맛을 한 번 보면 결코 후퇴할 수 없다.



    델마는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삶을 살았다. 이 말은 긍정적인 말이 아니다. 그는 ‘온실’이라는 가면을 쓴 남편의 통제 아래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의 삶을 살았다. 델마는 혼자 선택할 줄 모르고, 순진하다. 여행을 시작할 때 온갖 걱정과 쓸모없을 게 뻔한 짐들을 바리바리 싸오는 장면에서 이를 느낄 수 있다. 델마는 남편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 수 없었고, 순진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고, 그들은 족족 델마에게 상처를 안겼다. 영화에서 뚜렷하게 밝히지 않는 루이스의 과거는 루이스가 이미 한 번 상처 받은 존재임을 암시한다. 델마와 루이스는 꽤 다른 성격을 가지지만 상처 받은 존재라는 점에서 같다.


    델마와 루이스는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내내 경찰에게 쫓긴다. 그 살인이 정말 충동이었을까? 그들은 사는 내내, 아니 쫓기는 동안에도 크고 작은 폭력에 마주한다. 남편의 언어폭력, 주변 남성으로부터의 추파, 트럭 기사의 끈질긴 성희롱, 자신을 몰래 찾아온 애인의 폭력 등등. 그들의 폭력은 충분히 불쾌하고 공포스럽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 어떤 것도 문제 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델마와 루이스의 살인은 충동적인 것이 아닌 쌓여온 분노에 의한 반격이다. 트럭 기사의 트럭을 폭파해버리는 장면은 그 어떤 장면보다 통쾌하다.


    반격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길을 직접 선택한다. 긴장의 연속인 도주 상황에서 오히려 그들은 자유롭고, 행복하다. 어디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델마는 이제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간다. 과거의 델마는 성폭행을 당한 직후에도 눈물에 지워진 아이라인을 다시 그렸다.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산 후의 델마는 자신의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다. 식당 안에서 할머니가 창 밖의 루이스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장면은 사회의 여성을 향한 집요한 응시를 상징한다. 루이스는 그 응시에 잠시 거울을 보지만 이내 립스틱을 차 밖으로 던져버린다. 사회의 응시, 사회로부터의 타자화는 이제 그들을 좌지우지하지 못한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삶은 멋지다. 그리고 슬프다. 차 안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액셀을 밟는 마지막 장면은 아름답고 눈물 난다. 끌려다니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한 선택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이었다. 미치도록 살고 싶었고, 그랬기에 선택한 것이 죽음이라는 슬픈 역설이다. 그 이전의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게 되었고,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다른 선택지의 부재는 범죄를 행한 델마와 루이스의 탓이 아닌 세상의 탓이다. 놀랍게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의 경찰뿐이었다.


    강자와 약자의 위치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으며,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 권력관계는 허상이기에 순식간에 뒤바뀔 수 있다. 델마와 루이스를 단속하려던 경찰은 자신의 권위(경찰로서, 그리고 남성으로서)를 강하게 드러낸다. 그 권위는 총 하나로 쉽게 무너져 내렸고, 그가 권위를 잃은 장면은 굉장히 우습게 그려진다. 그 후에 찾아온 흑인 남성은 경찰의 우스꽝스러운 도움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 그저 트렁크의 숨구멍 안에 담배 연기를 불어넣을 뿐이다. 강자와 약자의 위치는 여성과 남성, 흑인과 백인 등등 복합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이 영화는 이점을 놓치지 않았다.



델마와 루이스가 여전히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차를 몰고 달리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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