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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Jun 19. 2020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허락보다는 용서가 쉽다.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법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혹은 자다니 큰 소리에 깨어보니 이미 모든 일은 걷잡을 수 없이 발생해 있는 것이고, 주인공은 어쩔 수없이 큰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시즌 8 정도까지 열심히 보았던 '워킹 데드'가 그래 왔고, 플레이 스테이션의 최대 역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가 그렇다. 그러고 보면 '월드워 Z'도 그렇지 않았었나. 어찌 되었건 '좀비'가 등장하는 콘텐츠의 시작은 크게 다르지가 않다. 그리고 이 '어느 날 갑자기'와 더불어 빠지지 않는 또 다른 하나가 바로 '가족애'겠지.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철저하게 '우리나라는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잠시 쉬고 있는 것이다'라는 교육을 받아오던 세대이다. 또 걸핏하면 북쪽에서는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 협박하던 시대이기도 했으니(요즘도 마찬가지인가?), 당연하게도 마음속에 전쟁에 대한 잠재적 가능성을 배제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가족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나름의 프로토콜을 만들어 두었다. 그러니까 각자가 일상을 보내고 있던 와중, 갑자기 도시 한복판에 좀비가 나타나거나 미사일이 떨어졌을 때의 행동강령이 있었다고 할까.


다행스럽게도 이 프로토콜대로 움직여야 할 일은 내가 성인이 되어 분가할 때까지 없었지만, 작지만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이 잠재의식은 계속 이어져 동유럽에 살고 있는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니까 이 곳에 갑자기 좀비가 나타나거나 미사일이 떨어졌을 때, 적어도 우리 부부는 이산가족이 되지 않기 위한 지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현재 가장 우선이 되는 우리의 방침은 쉽게 말해, '아내는 대기하고, 나는 길을 나선다.'이다. 누군가는 '이게 뭐야?'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위기 상황의 포로토콜은 무엇보다 단순함이 우선이지 않은가.

잠들고 싶지 않았던 어젯밤의 나는 그런 까닭에 구글맵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구글맵의 옵션을 위성으로 바꿔서는, 위급 시 아내가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곳, 그러니까 아내의 직장까지의 거리 40km 정도를 도보와 자전거길로 변환해서는 열심히 눈에 익히고 있었다. 40km의 거리라고 하면 걸어가거나 자전거로 달리기에는 다소 쉽지 않은 거리임에는 틀림없지만, 내가 종종 산책하는 길이 대략 2-3km 정도이니, 그의 15-20배에 달하는 거리라면 또 못 갈만한 거리가 아닌 것은 틀림없다. 다만 쉽지 않은 문제를 하나 발견하긴 했는데 중간에 적어도 3-4km에 달하는 숲 혹은 산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봤자 불과 3-4km밖에 되지 않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이 큰 오산이라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좀 더 젊은 시절 자전거 여행에서 만난 '경주의 토암산'은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길었던 여정에서 가장 큰 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응급상황에서 만난 그 길이 비포장도로라도 된다면, 자전거를 버리고 달리는 것이 더 현명할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나 이 동네에서 숲이란 것은 아주 재수가 없는 경우, 야생동물과 조우하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러니까 결론은 조만간 그 길을 답습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잠이 들었다.


물론, 지금까지 말한 이 모든 것들이 쓸데없는 기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비와 전쟁과도 같은 일을 가정하며 프로토콜을 세우고 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렇지 않은 편에 비해,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를 여러 위기 상황에서, 결과가 0이거나 100으로 극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커다란 차이로 나타나지 않을까. 그러니까 가끔은 좀비나 전쟁을 소재로 삼은 영화도 보고 '더 라스트 오브 어스'같은 게임도 해두는 것이 우리 삶에는 필요하지 않으려나.


...라고 아내를 설득하기에는 내일 발매되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를 구매하기 위한 명분이 모자란다.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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