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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로잉 에브리 두 Jan 30. 2022

퍼스널 브랜딩의 시대(2)

일을 통해 나를 알아가던 시간들


기억에 남는

수업들



엔씨소프트: 그림의 또 다른 역할

회사에 있을 때 했던 수업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순간들이 있다. 2018년 9월 내가 100명 앞에서 강의와 진행을 맡은 일이다. 이 경험이 특별했던 건 규모도 컸지만 그보다 수업 대상이 엔씨소프트 직원분들이었다는 데 있었다. 세상에 엔씨소프트라니. 그림이라면 1등 간다는 사람들만 들어가는 게임회사 아니던가. 그런 전문가들 앞에서 내가 1시간 반짜리 그림 그리는 수업을 진행한다면, 사람들이 과연 즐거워할까?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 아니야?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아직 시작도 안 한 상황에 불특정 다수의 반응을 상상하느라고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100명이라는 자리를 한꺼번에 세팅하려니 짐 풀고 구색 맞추는데만 반나절이 걸렸는데 테이블을 정돈하는 내내 마음속에서는 시끄러운 레이싱카가 요란을 피우고 있었다. 어느새 시간이 되어 한꺼번에 몰려들어온 직원분들로 순식간에 홀이 꽉 찼고 나는 마이크 앞에 섰다. 에라 모르겠다, '컴퓨터로 그리는 거랑 물감으로 그리는 거랑은 다르겠지. 그리고 이건 목적 자체가 그림이 주는 힐링타임이잖아.' 원래 답이 없을 땐 이판사판 공사판 아니겠나.



이렇게 마음속 소리 없는 아우성을 무시하며 수업을 시작했다. 이 지긋지긋한 공포는 모두의 캔버스가 반 이상 채워졌을 때부터 서서히 사라졌다. 그날 행사는 예상과는 다르게(?) 잘 마무리되었고, 터덜터덜 홍대에 가서 와인을 마시며 심신을 달랬었다. 대부분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걸 느꼈던 순간의 기억.










정릉실버복지센터: 자신감과 성취감을 찾아서





서울시립미술관 '찾아가는 미술 감상교실'에 우리 프로그램을 제안해서 처음 매칭 된 '서울 정릉 실버타운'에서의 수업. 마침 수업장소였던 정릉은 학교생활에 기억이 있는 곳이라 무척 반가웠다. 기본적으로 감상에 빠지기 쉬운 조건인 <할머니>, <자주 가던 동네>의 키워드라니, 오늘 수업은 그 어느 때보다 잘하고 싶은 의지가 마구 솟구쳤다.


할머니 스무 분이 수업에 참여하셨고, 그날 우리 수업의 주제는 '쉽게 하는 드로잉: 에펠탑 그리기'이었다. 빈 도화지에서부터 에펠탑이 완성되기까지 내가 앞에서 단계별로 시연하면 참가자분들이 호흡에 맞춰 그리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자유화도 좋지만, 성향에 따라 어떤 분들은 의외로 빈종이에서 당혹감과 중압감을 느끼시기도 하기에 이번엔 진행자를 A부터 Z까지 따라 그렸을 때, 낙오자(?) 없이 모두가 ‘완성’이라는 희열과 성취감을 함께 느껴보자는 취지였다. 그림이 주는 성취감은 실로 대단해서 한번 그림을 자기 힘으로 완성해보신 분들은 금세 취미가 되어버리곤 한다. 살면서 우리가 얼마나 자주 ‘완성’을 경험할 수 있을까. 미술로 느끼는 완성의 즐거움은 마치 책 한 권을 다 읽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와 비슷한 쾌감일 것이다.


70대 어르신들이 그리시는 에펠탑 펜화


같은 도화지에 같은 그림을 그리지만 성향대로 그림도 제각각이었다. 평균 연령 70대이신 참가자 분들은 본인의 성향에 맞춰 누구보다 열심히 그려가셨다. 자를 꺼내서 설계하듯이 그리시는 분도, 이런 건 잘 못한다면서도 수정 좀 도와달라고 완성에 대한 열정을 보이시는 분도, 올해 몇 살 먹었냐고 손녀딸 같다고 먼저 말씀을 건네시는 분도 계셨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과 함께 하면 대화를 할 수 있는 점이 참 재미있다. 그때 나눈 대화들 덕분에 잊히지 않는 기억이 남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찾아가는 미술감상교실 후기






트레바리: 영화와 함께 하는 그림 수업




나는 INFP 성향이다. 아무튼 내성적인 성향이라는 말인데 이런 나도 일을 통해 자주 사람들 앞에 서면서 새롭게 느낀 점이 있다면, 내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이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다는 점이다. 나는 주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혼자 있는 시간만큼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말 걸고 할 때 즐거움이 느껴졌다. 이렇게 프로그램 진행자가 되어보니 나도, 대답해주는 사람도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점이 좋았다. 일상생활 중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영화 같은 환경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성향의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우리나라 정서에서 갑자기 버스정류장에서 모르는 사람이 '저기요...' 하면서 말을 걸면 대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허락된 상황에서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내가 먼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오늘은 뭐 타고 오셨어요?" 라던지 "그림은 자주 그리시는 편이세요?"와 같은 생뚱맞은 질문을 하더라도 모두가 즐겁게 대답해준다.

트레바리 강남 수업

그리고 또 재미있었던 점은 '트레바리'라는 독서모임과 함께 하는 수업이다 보니 수업의 특징을 영화와 접목시켜 기획했다는 점이다. 처음 트레바리를 알게 되었을 때 이곳이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독후감도 나누는 '자발적 모임'이라는 점에서 몹시 끌렸었다. 사옥도 너무 예쁘고 깔끔해서 가자마자 나도 가입하고 싶다~ 생각했었는데, 아무튼 처음 트레바리 크루님과 미팅하면서 논의했던 내용은 트레바리 성격을 잘 살려서 크루분들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영화를 먼저 꼽아 보았다. 내가 좋아했고 이야깃거리가 많은 영화들. <노팅힐>, <레옹>,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터널 선샤인> 등 한 달에 한 번씩 영화의 짤막한 부분을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어 토론을 해보고 그 감정들을 담아 그림을 그려보는 수업이었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작품을 하나씩 만들어 가면 모두의 입가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었다. 어찌 보면 영화보다 영화 같은 순간들.

노팅힐에서 샤갈을 만나다. <캔버스에 아크릴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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