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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질 무렵

가을꽃 피는 농산물

아주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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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고 열매가 열리는 일도 때로는 새롭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밭을 보았을 때 곧 알곡이 알차게 여물어 밭이 번창하겠다는 생각으로 쉽게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요.


메밀은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곡식입니다. 봄여름에 아우성치듯이 꽃을 피우는 다른 작물들과 달리, 서늘한 날씨를 좋아하는 메밀은 해가 점점 짧아지면서 다른 것들이 마무리하려 들 때쯤 느지막이 꽃을 피웁니다. 보통 파종하고 한 달쯤 지나서 줄기와 가지 끝에 하얗고 자잘한 꽃이 무리 지어 피어나는데 꽃을 피우고 보름 정도 지나면 벌과 나비를 맞아 열매를 맺습니다.


생장하는 모양새를 보면 메밀의 무던한 성격을 만나게 됩니다. 병충해에 크게 영향받지도 않고 땅도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잘 자라서 옛날에는 흉년에 메밀을 심어 굶주림을 이겨냈을 정도였으니까요. 옛사람들에게는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풍경은 어쩌면 배를 주리지 않아도 됨을 알리는 화답이어서 더욱 아름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운 풍광 덕분에 요즘은 꽃만 보려고 메밀을 넓게 심어 관광객을 불러들이기도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관광지를 찾아 꽃만 갖춘 풍경을 보거나 마트나 식당에서 상품으로서 알곡을 만나는 일이 우리가 메밀을 만나는 전부이지 않나 싶습니다. 작물의 한살이를 경험할 기회가 없는 우리에게 꽃과 열매가 새삼스러운 사이로 여겨지는 건 이 때문이지 않을까요?


혹시라도 하얀 꽃밭을 찾게 되었을 때나 맛좋은 메밀 음식을 즐기는 날에 우리가 지금 함께 나눈 이야기가 떠오르면 좋겠습니다. 하얀 꽃무리와 밤빛 열매 사이를 잇는 조그마한 이야기들이 가을을 맞이하는 우리의 시선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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