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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등원 일주일, 아이가 글씨를 쓴다

by Hoon

처음으로 국내에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본 경험에 대해 예전에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https://brunch.co.kr/@yjeonghun/167

이 글은 그 후속편이랄까요, 어린이집 졸업 후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간 이야기입니다.


미국홍콩, 한국 3국에서 경험한 <어린이집>과 <유치원>. '아이를 돌봐 준다'는 본질만 같을 뿐, 너무도 다른 것이 많아 일종의 문화충격을 받는 중입니다. 한국에서 처음 겪어본 어린이집은 그저 빛, 신세계였다고 하면, 유치원은 다른 의미로 새로운 세계더군요. 고작 유치원 4개월 차지만, 그간 느낀 점을 써보려 합니다.



1. 한국 나이 5세, 기대치는 완전히 다르다

외국에 살 때는 왜 대체 한국에서는 아직도 한국 나이를 고수하나 싶었는데, 아이를 기관에 보내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나이로 4살인지 5살인지에 따라, 아이에 대한 기대치가 판이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말이죠. 5살부터는 본격적으로 '어린이' 취급을 하며, 학습의 준비가 된 (또는 되어야만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어린이집 4세 반에 다닐 때, 선생님께서 몇 번 강조하신 점이 있는데요, 바로 '4세부터는 차분히 앉아 활동하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저는 '잉? 마구 뛰어다닐 나이인데 왜 앉아서 활동을 시키시는 거지?'라고 내심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희 아이가 다니던 가정 어린이집은 4세 반이 끝이고 졸업을 한 뒤 모두 유치원에 가는 시스템이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이 유치원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신 것이었어요. 유치원에 가면 스스로 웬만한 일은 해야 하고, 앉아서 활동하는 시간도 늘어나기에 미리 준비해 주신 것이지요.

엄마들이 왜 '직장 어린이집을 7세까지 다녀도 될까요?' '조금 힘들어도 유치원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말들을 하는지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요즘에야 어린이집도 유치원과 비슷한 커리큘럼으로 간다고 합니다만, 예전에는 '어린이집=보육' '유치원=교육'의 공식이 성립했으니까요.


한국 나이 5세, 한국에서는 교육의 시작입니다. 학원도 본격적으로 5세부터 다니기 시작하죠. (**원래부터 한국에서 아이를 기관에 보내시던 부모님들은 뭐 이런 당연한 소리를 대단한 것처럼 하나 싶으시겠지만, 해외에서 키워보신 분들께는 아마 굉장히 새로운 정보일 겁니다 ㅋㅋ)


2. ‘놀이식’ 영유란 없다

게다가 저는 이제까지 영어유치원이란 보통 유치원과 비슷하지만 영어를 위주로 쓰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순진무구) 소위 말하는 '학습식' 영어유치원이야 좀 힘들겠지만, 놀이식 영어유치원은 토마스 기차랑 놀면서 자연스레 영어를 습득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했지요.


제가 사는 지역에 유명한 놀이식 영어유치원이 있기에 지원을 해 보았는데요, 딱히 거창한 목표가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경제적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첫째가 해본 다양한 해외 경험을 둘째는 못 해봤기에 영어유치원이라도 보내주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형아는 영어를 하는데 본인은 못하니 둘째가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하기도 했고요.


이런 안이한 생각으로 영어유치원 설명회를 갔는데, 인산인해를 이루는 모습을 보고 일단 1차로 놀랐습니다. 다들 입시를 치르듯 진지한 표정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때조차 한국에서 '영어유치원'이 갖는 의미에 대해 몰랐던 것 같습니다. 운이 좋아 이 유치원에 다니게 되기는 했는데, 제가 생각한 '놀이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습니다. (대체 ㅍㄹ는 어떤 곳인가)


한국 나이 5세, 만 3세인 아이들인데 벌써 라즈키즈 앱으로 읽기를 시키고, 파닉스를 배우고, 칸에 맞춰 글씨 쓰기 연습을 하니까요. 첫째가 만 3세일 때 다녔던 프리스쿨을 생각해 보면 실질적으로 한 것이라고는 공룡 놀이(...)었던 것 같은데, 정말 다른 모습입니다.

tempImageIlte2r.heic 첫째는 3세 때 외국에서 주로 이러고 있었음..

소근육 발달이 별로 빠르지 않았던 저희 둘째도, 3월 학기가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주말에 책상 앞에 앉아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니까요. '대체 유치원에서 얼마나 많이 한 거니..'


3. '바깥' 놀이가 적다

가장 큰 차이점은 바깥 놀이입니다. 저희가 미국 서부에 살았을 때, 날씨가 좋아서인지 아이는 매일 오전, 오후로 바깥 활동을 했습니다. 어린이집 야외 공간이 실내 공간보다도 훨씬 넓었고요. 그런데 동부에 이사를 갔을 때, 사계절이 한국만큼이나 뚜렷한데도 야외 놀이 시간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눈폭풍이 와서 아예 등원을 못했던 며칠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아이는 바깥에서 놀 시간이 있었거든요. 더운 날은 아예 물놀이를 시키고, 눈이 오고 추운 날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미국 아이들은 내복도 잘 안 입는데, 신기할 따름입니다.) 두껍게 입히는 건 자연스레 부모의 몫이 되고요.


하지만 한국에 와 보니, 미세먼지나 날씨를 이유로 야외 활동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더군요. 물론 미세먼지를 직접 겪어보니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아이들의 호흡기 건강을 지키는 게 우선이니까요. 그러나 일 년에 산책이나 바깥 놀이 기회가 몇 번 되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도 야외 활동이 가능한 부지를 따로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실내에서 체육 시간을 갖는 것으로 대체하는 듯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tempImageqZled3.heic 맨날 그지꼴이 되어 귀가하던 첫째가 생각납니다

(독일에서 두 아이를 키우시는 이진민 작가님은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라는 저서에서 유치원에서 바깥 놀이를 한 아이들이 '새벽 3시에 감자탕집에서 갓 나온 취객의 행색'이라고 하셨...)



4. 영유 학부모는 철저히 ‘고객‘이다

다른 유치원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유의 학부모는 비싼 학비를 내고 있는 만큼 철저히 고객으로 모셔지는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고객에게는 늘 친절하게 응대하고, 세심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성과를 보여야죠. 마찬가지로 영유 선생님들은 아이 관련해서 자주 연락을 주시고, 아이의 학습 발달 상황을 자세하게 공유해 주십니다. 무엇을 가르쳤으며 얼마큼 따라가고 있는지, 마치 기업 성과 보고서를 작성하듯 말이지요.


유치원에서 행사가 있거나 준비물이 있어도, 적어도 두세 번 이상 키즈노트와 카카오톡을 통해 공지를 받습니다. 물론 외국에서도 공지를 받기는 했으나, 한 번 알려주면 끝이었어요. 반면 한국 유치원에서는 한 명의 아이도 잊지 않고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 번 공지해 주는 느낌입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게 되어 좋습니다. 감사할 뿐이죠. 하지만 외국에서 느꼈던 교사-부모 관계와는 매우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서 바깥 놀이를 할 때도, 겨울에 아이 옷을 두툼하게 입혀서 감기 걸리지 않게 하는 건 부모의 몫이라고 했는데, 학업 부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교실 안의 아이는 각자 배움의 속도가 다르기에, 같은 걸 가르쳐도 받아들이는 건 오롯이 아이의 몫입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을 때 부모가 도와줄 수는 있지만, 적어도 교사의 책임은 아닌 것이죠. 교사는 최선을 다해 아이를 보살펴 주지만, 그 이상을 요구받지 않습니다.



아이마다 자라는 속도는 다르다

바로 여기서 본질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제가 첫째를 외국에서 키우며 선생님들께 가장 많이 들은 얘기는 바로 이것입니다.


Every Child is Different.
모든 아이는 다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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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이라고 해서 각 연령에서 이루어야 할 발달 과업이 없는 게 아닙니다. 6개월쯤 되면 앉고, 돌 때쯤 되면 걷고, 만 2세쯤 되면 말을 하기 시작하는 건 전 세계가 똑같죠. 다만 교육의 영역에서, 과업을 달성하는 연령의 기준과 폭이 상당히 유연합니다. 한국은 '이 나이엔 이걸 해야 해. 못 하면 도와줘서 하도록 만들어야 해'라는 마인드라고 한다면, 외국에서는 '이 나이에 보통 이걸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아이는 아직 못해. 하지만 다른 것에 강점이 있으니, 두고 보자.'라는 셈이죠.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자란 아이들은 크게 뒤쳐지는 부분이 없는, 보다 '표준화'된 어린이들로 자라나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돌아온 뒤 학원을 다니는 스케줄도 많이들 비슷하고요. 외국에서도 과외 활동을 많이들 시키지만, 아이의 성향에 따라 활동 시간이나 종류의 편차가 큰 편이거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예체능 학원을 주로 다니는 연령이나 영어나 수학 학원을 시작하는 학년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한국적 시각 또한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의 평균적인 학습 수준이 세계적으로 높은 이유기도 하고요. 또, 유독 느린 학습자를 키우거나 발달상 문제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는 보다 일찍 문제를 파악하고 대응할 기회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저희 아이도, 글씨를 배우고 읽고 쓰며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기에 이 곳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아이가 표준화된 틀에서 뒤처질 경우, 다른 강점으로 눈을 돌리는 대신 부족한 점을 보강해야 한다고 지적받는 것은 아이가 가진 개별적인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비주얼 띵킹>이라는 책을 쓴 템플 그랜딘은 자폐증을 앓고 있지만 저명한 동물 행동 전문가이며 연설가입니다. 전통적인 틀 안에서라면 그녀는 느리고 뒤쳐진 학습자로 분류되었을 거예요. 그녀는 '사고 유형마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고유한 방식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공통된 발달 지표로 개별적인 아이를 평가하기에는 한계가 있단 것이지요.


인공지능이 삶의 현장에서 보편화될 미래에는, 개개인이 가지는 고유성이 학습적 성취보다 훨씬 중요해질지도 모릅니다. 챗GPT 창에 질문만 입력하면 완벽한 답변이 촤르르 뜨는 세상이니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 예전의 기준을 못 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여기저기서 '7세엔 영유를 보내서 영어를 마스터 시켜야지' '초등 고학년부터는 수학 1년 이상 선행은 필수지'라는 말을 듣게 마련입니다. 한국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런 시각이, 아이의 '배움'이라는 마라톤에서 얼마나 힘을 가질지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 이미지는 모두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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