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시간의 계곡>
내가 사는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미래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과거인 것이다
보통 타임슬립물이라고 하면 현재의 세상에서 과거나 미래로 가는 이야기죠. 과거에서 뭔가 변화시키면 내가 떠나온 현재가 변해버리기도 하고요. 하지만 대개의 타임슬립물과 달리, 실제로 다른 시대를 사는 세상이 여러 개 병렬적으로 존재한다면 어떨까요? 말 그대로 20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나와 20년 후의 내가 동시에 존재하는데, 서로 다른 공간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시간의 계곡>은 그런 의미에서 설정이 독특합니다. ‘세상의 숫자’가 더 많거든요. 한 세계의 담장을 넘어가기만 하면, 과거와 미래에 갈 수 있어요. 타임머신 없이도 시간 여행이 가능하단 얘기죠. 다만 세계 간의 이동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되는데, 예를 들어 사랑하는 가족을 예기치 못한 사고로 잃을 경우, 20년 전으로 돌아가 생전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런 경우는 아주 엄격하게 대상자를 선별하여 헌병을 대동하여 방문이 이루어지는데, 절대로 무언가 변하게 하거나 누군가 상호작용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말 그대로 ‘볼‘ 수만 있는 것이지요. 그게 아니라면 현재와 미래 세계의 모든 것들이 다 엉망이 되어버릴 테니까요.
이 소설을 읽다 보면 과연 나는 어떤 시점의 세계를 관찰하고 싶은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됩니다. 20년 전, 지금보다 젊으신 부모님의 모습이나 생전 조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싶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20년 후의 세상을 한 번 관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I 혁명, 신종 바이러스, 핵전쟁의 가능성, 이런 여러 변수들을 생각하면 과연 20년 후의 인류는 지금처럼 비교적 평화롭고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요. 무엇보다 기후변화 때문에 더 그렇죠.
20년 후에는 과연
최근, 저명한 기후 과학자 제임스 핸슨 박사는 뉴스레터를 통해 이제까지 IPCC가 추정하던 기후 민감도(climate sensitivity)가 사실은 상당히 과소평가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기후 민감도란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2배가 된다면 지구의 기온이 얼마만큼 올라갈 것인지를 추정하는 수치예요. 인구 증가와 경제 활동으로 인하여 온실가스 배출량이 산업화 이전에 비해 너무도 빠른 속도로 늘어나다 보니, 이대로라면 얼마나 지구가 뜨거워질지 걱정이기 때문에 이 숫자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기후 민감도가 0.1도밖에 안 된다면 좀 안심해도 되겠죠.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아무리 늘어나도 기온의 상승 폭은 비교적 작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물론 기후 민감도가 그렇게 작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이는 사실과는 매우 다릅니다.
IPCC는 여태 기후 민감도가 3도 정도 될 것이라고 했었어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지구 평균 기온이 2도가 넘어가면 생태계와 지구의 대기, 해류의 순환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때문에 결코 안심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UN을 중심으로 한 국제 협상에서도 ”2도“의 목표가 대세였죠. 사실 1.5도를 목표로 하자는 의견도 많았지만, 어차피 1.5도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이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이미 넘어간 곳도 많습니다) 2도를 마지노선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핸슨 박사가 고차원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니 사실 기후 민감도는 이보다 훨씬 더 클 것이라는 겁니다. (망했다)

4.5도 정도로 추정된다는데(!), 2도-3도 이상이면 뭐 인간의 문명은 붕괴될 것이 뻔한 얘기거든요. 그야말로 비극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년 후의 미래를 빼꼼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도 바로 이 때문이에요. 과연 인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저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서늘해집니다.
20년 전에는 과연
제가 처음으로 기후에 대해 진지하게 배웠던 시기는 2008-2010년 경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만 해도 2020년을 목표로 국가들이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2020년이 되면 재생 에너지를 얼마만큼 늘이고, 배출량을 얼마만큼 줄이고, 에너지 집약도를 어떻게 낮추고, 등등 말이지요. 당시에는 2020년이 까마득하게 먼 시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2020년이 도래하면 정말 꽤나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착각했죠.
문제는 늘 그랬단 겁니다. 1997년, 본격적으로 기후에 대해 법적인 의무를 천명한 <교토 의정서>가 나온 지도 30년이 되어가는데, 아예 성과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 꿈꿔왔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지금의 정책적 상황은 암담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인구도 엄청나게 늘고, 개발도상국들의 산업화도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일반적인 생활 수준이 상승하여 에너지 소비가 전 지구적으로 매우 증가했기 때문이지요. 제아무리 재생에너지 발전비율을 늘리고 에너지 전환을 위해 노력한다 한들, 전체 그림에서 개선된 부분은 새발의 피 수준입니다. 전체 그림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도 있고, 노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점도 있습니다.
게다가 현재 미국을 필두로 기후 담론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추세가 두드러집니다. 최근 Carbon Brief에서 트럼프 행정부에서 기후 관련 예산 축소를 정당화하기 위해 발간한 보고서를 낱낱이 분석했는데 (솔직히 그런 보고서 있단 것에 약간 놀람. 그냥 막 자기 맘대로 축소하는 줄) 사실과 다른 부분이 무척 많음에도 불구하고 기후 대응은 제일 뒷전으로 내쳐졌습니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빨간색 페이지가 '틀린' 부분이고, 주황색 페이지는 '오해의 여지가 있거나 사실을 호도하는'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이 보고서를 발판 삼아 기후 관련 예산은 죄다 삭감되고 있는 판국이지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가 이러면 뭐 게임 끝 아니겠어요?
지구 곳곳에서는 유례없는 폭염이라는 기사가 쏟아지고, 이는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름에도 에어컨이 필요 없는 알래스카나 노르웨이도 수은주가 30도를 넘어갔고요. 대기 중 물의 양이 많아져 동남아처럼 스콜성 폭우가 내리다 보니 한국도 물난리로 매년 난리입니다. 월요일 제외하고 매일 하는 야구도 며칠 연속 우천취소 되었는데, 이는 실제로 비가 온 날도 있지만 대책 없이 비가 쏟아져 야구장이 엉망이 되어 경기를 못하기도 했어요. 기존에 만들어둔 인프라로 기후 위기의 세상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란 거죠. 이제 인프라 개선처럼 기후 적응 방안에 더 노력을 쏟아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어차피 더워질 것은 자명하고, 돌이킬 수도 없어지는 것 같아요.
반대로 20년 후 미래에서 현재를 보면, 과연 우리가 현재 시점에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될 겁니다. 20년 전에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어야 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죠. 20년 후의 모습을 궁금해하다 보니 다음의 인용구가 생각나네요.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다리를 건너고 있단 생각이 듭니다.
급격히 변화하고 요동치는 시대,
우리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문턱, 현관, 또는 보이지 않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
이 다리는 우리 아래에서 무너지거나,
한 문명이 다른 문명에 자리를 내주는 긴 여명의 시간 동안 우리가 함께 걷도록 해줄 수도 있다.
In our time of disturbance and radical change, we are crossing a threshold, a portal, or an unseen bridge from on eowrld to another. It could be said that the bridge is either collapsing beneath us, or being made as we walk together, in the long twilight hours when one civilization gives way to another.
- Geneen Marie Haug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