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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고베 대지진 1주일 전

by Hoon

내 첫 해외여행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언니와 단둘이 떠난 일본 여행이었다.


물론 언니랑 나랑 단둘이 간 건 아니고, 방학 때 초, 중등학생을 대상으로 개최된 1주일 겨울 캠프로 갔다. 그러고 보면 그전 해에도 우리 부모님은 3학년과 6학년 자매를 국내 일주일자리 여름 캠프에 보내셨었다. 요즘에야 이런 일이 흔해졌을지 몰라도, 내 주변엔 일주일씩 부모와 떨어져 캠프를 가는 초등생은 흔치 않았다. 어디 가든 적응을 썩 잘하던 나는 3학년의 여름 캠프에서 친구도 사귀고 추억을 한 아름 안고 집에 왔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나 이번에는 무려 해외로 캠프를 떠나게 된 것이었다.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서 잠깐 살기는 했지만, 워낙 어렸을 때라 그저 부모님이 이끄시는 대로 다녔을 뿐이었다. 일본 캠프는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듣고 느끼는 경험을 오롯이 나 혼자서 담아내는 경험이었다. 캠프는 일본 오사카, 교토, 고베, 나라 지역을 둘러보는 것이었고, 다소 노골적인(?) 의도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역사 교육 여행을 표방하고 있었다. 백제가 일본에 끼친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배우기 위해 교수님까지 한 분 동행하셨다. 저녁때마다 아이들을 모아 놓고 프로젝터를 동원하여 수업을 했다.


다른 아이들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수업이 너무너무 재미있었고, 뒤돌아보면 후에 형성될 나의 가치관이나 의사 결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교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성함도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꽤나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셨던 분 같다. 한, 중, 일의 건축 양식부터 문화까지, 다양한 부분을 비교해 가며 한국의 것이 얼마나 우수한지, 일본이나 중국의 것들에 비하여 얼마나 우아하며 중용의 미덕이 있는지를 몇 번이나 강조하셨다. 일례로 각국 건축물의 ‘처마’. 화려하고 장식적인 중국의 처마와 밋밋하고 직선에 가까운 일본의 처마에 비해 한국의 살짝 올라간 처마 끝이 얼마나 아름답고 섬세한지에 대해 한 시간은 설파하셨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그것이 지나치게 단순화된 감이 있고 (생각해 보라. 강의 대상이 초딩이란 것을) 당시의 역사 교육에 민족주의적 색채가 비교적 강했었단 걸 안다. 그러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을 떠나, 동아시아 문화권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단 것,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를 대등한 선에 놓고 비교할 수 있단 것에 나는 깊이 매료되었다. 금각사의 반짝이는 연못 그림자만큼, 일본 여행은 내 어린 시절 화려하고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일본에 비행기가 아닌 배를 타고 갔다. 꿀렁꿀렁거리는 배 선실에는 이층 침대가 여럿 있었고, 같은 방 아이들과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 TV 채널을 돌려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몹시 야한 성인방송(...)이 나와서 황급히 껐던 기억도 있다. 뭍에 도착해서 간 일본 식당들은 하나같이 달디단 반찬을 내왔고, 우리는 그 와중에도 “오미즈 구다사이”며 ”아리가또“를 배우고 시간마다 달라지는 일본어 인사말을 외웠다. 어느 숙소에서는 온천이 있었는데 여탕이 바깥에서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로 되어있어 아이들과 “꺅” 하며 도망치기도 했다.


나는 한국과 비슷한 것과 다른 것들을 열심히 찾았고,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즐겁고 짜릿했다. 지금보다 일본과 한국의 세계적인 위상이 참으로 다를 때였는데도, 어린이였기 때문에 주눅 들 일도, 욕할 일도 없었다. 그저 신기하고 참신했다.



언니가 함께하기는 했지만 다른 반이었기 때문에 나 혼자서 문제 해결을 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당시 겨울인지라 발목까지 올라오고 안에 기모가 덧대진 부츠 운동화(?)를 신고 갔는데, 겨우내 신은 것이라 낡아서인지 한쪽 신발 밑창이 슬금슬금 떨어지기 시작했다. 뒤꿈치가 조금씩 들리더니 마침내는 앞꿈치 몇 cm 남기고는 전부 떨어져서 대롱대롱 매달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아예 떼내려니 양쪽 높낮이가 맞지 않고, 다시 붙이려니 접착제나 테이프도 없었다.


지금의 나라면 아이가 이런 꼴로 다녔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마도 “선생님께 가서 말했어야지! “라고 혼냈을 것 같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선생님께 가도 뾰족한 수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내가 생각해 낸 해결책은 껌을 붙이는 것이었다. (용케도 껌은 또 챙겨 갔나 보다) 껌을 씹다 뒤꿈치에 붙여 깔창 접착제로 사용하고, 몇 시간 후 또 떨어지면 사탕을 먹다 뱉어서 또 붙이곤 했다.


다행히 여행 막바지에 벌어진 일이라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는 깜짝 놀라시며 바로 신발을 버리곤 새 신발을 사 주셨다.



모든 비용이 포함이었기 때문에 따로 우리가 돈을 가져갈 필요는 없었지만, 부모님께서는 엔화를 조금 주셨다. 별로 쓸 일이 없어 여행 내내 가지고만 다니다가, 막바지에 기념품 가게에 들렀을 때였다.


조그만 회색 고양이 피규어가 눈에 띄었다. 도자기도 아니고, 플라스틱도 아니고, 지금 생각해도 뭘로 만들어진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청나게 예쁘고 고급스러웠다. 게다가 깨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고양이의 얼굴은 사랑스럽고 도도했으며 무엇보다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격이 아직도 기억난다. 2천 엔.


우리나라 돈으로 2만 원 꼴이니, 그때 물가를 생각하면 정말 거금이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 고민하다 바로 그 고양이를 샀다. 그리고 애지중지 가지고 와서 성인이 될 때까지 그 고양이를 방 책장에 올려놓고 매일 쳐다보며 지냈다. 엄마는 내 고양이를 보고도 한 번도 “뭘 이런 걸 사 왔니, 쓸데없이.”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예쁘다고 해 주시고, 어디에 놓을지 같이 고민해 주셨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늘 그랬다. 어린 눈에는 꽤나 소중하지만, 어른들의 눈으로는 한없이 하찮은 것들에 대해. 이를테면 보석 모양을 한 플라스틱 장난감이라든지, 힘들게 찾은 네 잎 클로버라든지, 향기 나는 책갈피라든지 하는 것들. 덕분에 나는 쓸모없는 것들을 모으는 어린 시절을 가질 수 있었고, 그 덕인지 쓸모 있는 것도 잘 안 사는(?) 어른이 되었다.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큰애가 이번에 열두 개쯤 되는 샤프를 두고 또 샤프를 사 왔는데, 문득 회색 고양이를 생각났다. 자기 딴에는 무척이나 특별하겠지.



우리가 귀국하고 바로 다음주.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다.


신문에는 통째로 쓰러진 고가 도로와 산산이 부서진 주택들이 실렸고, 나와 언니는 그곳에서 친절히 우리를 안내해 주시던 현지 가이드 선생님이 걱정되어 안절부절못했다. 지금 같으면 SNS나 이메일이라도 주고받았을 텐데, 정답게 며칠을 지내고도 연락이 닿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


당시 우리 부모님이야말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계셨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는, 내 어린 마음에는, 일본에서 만났던 가이드 선생님이며 종업원이며 운전기사님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엄마에게 캠프 주최 측에 연락해서 확인해 볼 수 없냐고까지 물었다. 결국 그 시간도 다 지나갔지만..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그 대지진이 일어나기 불과 일주일 전, 눈을 반짝이며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던 4학년 한국 소녀가 다녀갔음을. 또, 당시에 피해를 입은 분들이 모두 상처에서 극복하고 평안한 날들을 보내고 계시기를. 그때의 마음이 잊히기 전, 기억의 작은 조각을 써내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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