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폴란드 할머니의 빨간 샌들

by Hoon

벌써 십수 년 전 이야기다.


새댁이었던 나는 남편을 따라 미국 생활을 막 시작한 상태였다. 예전에 한국에서 대학생일 때도 학교 미술관에서 도슨트 봉사를 할 만큼 미술관이라는 공간 자체를 좋아하던 나는, 인근 대학교의 미술관을 보고 뿅 가서(?) 그곳에서도 봉사를 하기로 맘을 먹었다. 전공자도 아니고 장기간의 교육을 이수한 것도 아니기에 도슨트는 당장 하기 어려웠지만, 미술관 입구에서 안내 봉사는 빈자리가 있었다. 매주 토요일 오전, 4시간씩 하는 일정이었다.

tempImageq2V76O.heic 이미지: Unsplash.com


자발적인 봉사지만 대학교 측에서는 생각보다 매우 엄격하게 봉사자를 관리했다. 아마도 재미있어 보여서 시작했다가 사정이 생기면 잠수를 타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언제나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댄디하게 옷을 차려입은 관리자는 매주 상세한 지시 사항이 적힌 장문의 이메일을 발송했고, 나는 모범생처럼 이를 숙지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봉사에 임했다.


정문 안내 데스크에 나와 함께 배치된 봉사자는 두 명 더 있었다. 한 명은 폴란드 이민자인 이레나 할머니였고, 다른 한 명은 페루에서 이민 온 기예르모 할아버지였다. 한국에서 막 온 나까지, 안내 데스크는 이미 다양성의 축제였던 것 같다.


기예르모 할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해 항상 앉아 계셨지만, 늘 흘러넘치는 미소로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나는 모범생답게 미술관 지도와 주의사항("배낭은 꼭 앞으로 메세요. 뒤를 돌다가 미술품이 다칠 수도 있어요." "음료는 뚜껑 있는 병에 담아 가방에 넣었을 때만 반입 가능합니다.")을 담당했다. 이레나 할머니는 에너지가 넘쳐 늘 안내 데스크 밖에 서 계셨다. 비 오는 토요일 오전, 관람객이 드문 날에도 정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한 명이라도 누군가 들어오면 팔을 잡고 다정하게 그날의 기분을 묻고, 미술관에서 꼭 보고 싶은 작품은 없는지 묻고, 진심을 다해 반갑다고 말해 주었다.


이레나 할머니는 외모부터 시선강탈이었다. 체구는 아주 작고 깡말랐지만 70세 가까운 나이에도 새까만 생머리를 엉덩이까지 기르고 계셨다. (염색한 느낌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까맸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대개 머리를 하나로 땋아서 늘어뜨렸지만, 가끔은 양갈래 머리를 할 때도 있었다. 옷차림은 어찌나 시크한지, 늘 올블랙 차림이었다. 주로 검은 블라우스에 스키니 블랙진을 입고 계셨는데, 새까만 머리카락과 합쳐져 세상 힙한 마녀 할머니 같기도 했다. 나는 그런 이레나 할머니가 처음부터 좋았다.

tempImage2VEt4a.heic 이미지: Unsplash.com



우리는 당시 가난한 유학생 부부였지만, 그 지역 자체는 사실 굉장히 부유한 동네였다. 그곳에 집을 소유하고 거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의 척도가 되었으니까. 미술관을 찾아오는 관람객들이나 다른 봉사자들 역시 대개 금전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분들이 많았다. 미술관에서는 지역 아동을 대상으로 토요 미술 교실을 운영했는데, 아이들이 이 수업을 듣는 동안 부모는 미술관을 둘러보거나 그 시간에 맞추어 봉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가족을 통해 문화 자본이 대물림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을 접하고 즐기는 기회가 그곳 아이들에게는 일상적으로 주어졌으니까.


그러나 이레나 할머니는 가족이나 손주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근처에 사는 것 같지도 않았다. 1년 가까이 함께 봉사를 하며 알게 되었는데, 할머니가 기차로 40분이 넘는 거리에 있는 대도시 원룸에 살고 있고 토요일마다 기차로 힘들게 이 미술관까지 오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다들 잘 알다시피 미국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차 없이 살기가 매우 어렵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힘들어도 차는 필수재에 가깝다. 차가 있어야 회사도 가고 장도 보니까. 그러나 할머니는 돈을 받는 일도 아닌데 주말 아침에 30분을 걸어 기차역에 가고, 40분 동안 기차를 타고, 다시 30분을 걸어 미술관으로 오고 계시는 것이었다. 단지 관람객을 맞이하는 봉사를 하기 위하여.


할머니가 왜 그렇게 힙한 차림인지도 나중에 알았다. 직업이 의류 판매원이었던 것이다. 언제나 자신을 깔끔하고 멋지게 꾸미고 옷가게에서 일을 했다. "큰돈이 되는 건 아니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딱히 없거든. 옷을 팔려면 파는 사람부터 옷을 잘 입어야지." 이레나 할머니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딸이 하나 있지만 거의 절연 상태고, 다른 가족은 전혀 없어서 자기는 꼭 일을 해야 한다고. 내가 아름다움을 느낀 건 그다음이었다. "미술관에 오는 이 시간만큼은 나를 위한 시간이야. 걸어오면 어때, 건강에 좋기만 하지." 할머니는 누구보다 우아한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게 참 좋았다. 나이가 들면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안온한 노년을 보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누굴까. 이런 자주적인 삶도 있는데.



미술관 봉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 초기인 데다 컨디션도 좋아서 일상을 지속했는데, 어느 날 안내 데스크에 서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 돌더니 세상에 하얘졌다. 나도 모르게 데스크를 붙잡고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유달리 관람객이 많은 날이어서 말을 많이 해서 그랬던 걸까. 기예르모 할아버지와 이레나 할머니가 놀라서 내게 달려오셨다. 할아버지는 관람객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도록 자신이 안내를 도맡았고, 할머니는 나를 부축해 의자에 앉히셨다. "미안해요,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민망해하자 할머니가 내 얼굴을 보더니 단번에 물으셨다.


"Honey, are you pregnant? (자기, 임신했어?)"


역시 촉이 좋으셨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는 여전사처럼 강건하게 나를 데리고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내가 추스를 수 있게 도와주셨다. 임신 초기에 누구나 그럴 수 있고 자신도 그랬다며, 걱정 말라고 하셨다. 관리자에게 나는 집에 가서 쉬어야 한다고 말해 주시고, 남편이 올 때까지 내 손을 잡고 기다려 주셨다. 친정도 없는 외국에서의 첫 임신. 나는 폴란드 할머니에게 큰 위로를 받았다. 그 후로도 할머니는 아이 이름을 같이 고민해 주시고, 폴란드의 임신 출산 문화, 음식 같은 것들에 대해 많이 나눠 주셨다. 그렇다고 몸조심하라거나 어떤 건 삼가라거나 이런 말씀은 일절 안 하셨다. 원래 좋아하던 토요일이 이레나 할머니 덕에 더 좋아졌다.


이레나 할머니에게는 진짜 멋진 빨간 샌들이 있었다. 웨지힐이었는데, 할머니의 작은 키를 10센티는 높게 만들어주었다. 올블랙에 새빨간 샌들이라니, 나는 할머니가 그 신발을 신고 미술관에 오실 때마다 예쁘다고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몇 시간씩 걸어도 끄떡없을 만큼 편하기까지 하다며, 자기의 최애 아이템이라고 하셨다. 나는 빨간 신발이 딱 할머니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나만의 빨간 신발을 찾아서 신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빨간 신발을 신고 미술관에 와서 대가 없이 남들을 돕는 에너지를 평생 간직하고 싶다고.

tempImageKndoEv.heic 이것보다 훨씬 더 예뻤음!



한참 시간이 지난 뒤, 봉사를 그만두고 아기를 낳아 키우던 어느 날이었다. 첫 아이를 키우느라 다른 생각은 거의 하지 못하던 나날이었는데,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혼자 쇼핑센터에 가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어디선가 "훈!" 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이레나 할머니였다. 여전히 칠흑 같은 올블랙 차림에, 양손 가득 무언가 들고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포옹부터 하고, 아기도 보여 드렸다. 할머니는 자기랑 고민했던 이름으로 지었냐며 즐거워하셨다.


내내 하도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셔서, 나중에 할머니가 그날 자기가 직장에서 해고되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너무 놀랐다. 그래서 양손에 직장에서 자기 물건을 챙겨 가득 들고 나오신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내 이야기만 한 것 같아 너무 미안하다고 하자, 이레나 할머니는 내게 "너를 만난 게 오늘을 밝혀 주었는데 뭐가 미안해!"라며 걱정 말라고 하셨다. 가봐야 한다고 손을 흔들고 가셨는데, 그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한동안 내 삶이 바빠 완전히 잊고 있다가, 문득 떠올랐다. 폴란드 할머니가 내게 나눠주셨던 그 마음이. 워낙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분이지만, 누구나 나이는 들기에 내심 걱정도 된다. 어디선가 건강하게 그 빨간 샌들을 신고 돌아다니고 계시기를. 그게 아니더라도 초록색 플랫슈즈라도 진짜 멋진 걸로 신고 계시기를.


할머니는 늘 자기가 혼자라고 했지만, 내게 나눠준 온기만큼 나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폴란드 이민자 이레나에 대해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와 내 아기 안에 그분의 조그만 조각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리고 나도 작은 마음의 조각들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며 살려고 한다. 그렇게 서로 더 많이 연결되도록. 누구도 혼자가 아닐 수 있도록.

tempImagekBTIYS.heic 이미지: Unsplash.com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춘기 문턱, 아들 관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