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의 낮과 밤.
언어 능력자 파비서(파파고)와 길치 구원자 구기사(구글맵)가 함께라면 지구는 둥그니까 온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나고 올 수 있던 시절. 국내도 좋지만 하지 말라면 더 간절해지는 청개구리 심리가 해외로의 여행을 갈구하게 한다.
여행지를 정하는 기준은 딱히 없다. 오래전부터 계획한 곳이 아니고서야 그냥 티켓값이 저렴한 출발일에 연차를 쓸 수 있으면 그 달 그 날 그 요일에 그곳으로의 여행이 결정된다. 대게 이렇게 결정되는 여행지들은 3시간 안팎으로 갈 수 있는 가까운 나라. 혼자 제주도 여행은 해봤는데 3박 4일 동안 컵라면만 먹었던 기억에 해외만큼은 스케줄 맞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어야 간다.
4월 후쿠오카의 낮
3일 내내 젖거나, 덜 젖거나의 연속. 밤낮으로 비가 왔다. 오늘은 맑겠지 하는 나태한 생각에 멀쩡한 우산은 숙소에 두고 종일 손수건을 쓰고 뛰어다닌 날. 덕분에 오들오들 떨다가 마신 커피는 꿀처럼 달았고, 뜨겁게 끓는 전골 열기에 젖은 몸을 말려가며 삼킨 하이볼은 꿈처럼 짜릿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3박 4일 여행기간이 딱 일본의 공휴일인 '쇼와의 날'. 나는 준비성 없는 예스맨이고, 같이 간 임여사는 스마트한 허당이다. 들뜬 마음 아래로 눌러놓은 '항공료는 싼데 왜 숙소는 비싸지?'라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후쿠오카 한 복판에서 유레카를 얻은 우리는 실없이 웃었다. 건물 벽마다 쓰여 있는 '골든위크'라는 현수막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휴가를 맞아 여러 지역에서 몰려드는 현지인들과 만원 버스를 공유하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평생 볼 일본인은 다 본 것 같다.
후쿠오카의 낮은 내리는 비와 상관없이 꽤 활발했다. 큰 도로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패션 피플들. 지상, 지하 할 것 없이 빼곡하게 들어선 대형 백화점과 쇼핑센터. 달달한 간장 냄새와 디저트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는 골목의 작은 식당마다 길게 줄을 선 모습이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이국적이었다.
쇼핑에 별 흥미가 없는 나와 친구는 3일 내내 위를 괴롭히며 열심히 먹으러 다녔다. 우유가 특산품인 지역의 크림으로 만든 커피, 유명한 편의점의 말랑한 생크림빵, 2시간을 줄 서서 먹었던 국물 없는 가락국수. 라스트 오더 20분 전에 들어가서 먹었던 스키야키에 진저 하이볼. 숙소 앞의 본토 이자카야. 화룡점정으로 마지막 날 먹었던 랍스터 핫도그 까지.
점심을 든든히 먹은 터라 큰 사이즈 하나 사서 친구와 반씩 나눠 먹었던 그 핫도그의 첫 한 입이 준 맛의 충격은 피카츄의 백만 볼트를 맞은 느낌이었달까. 랍스터니 킹크랩이니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것들의 살을 발라내어 따끈한 빵에 머스터드를 올린 그 맛은 스트릿 푸드 중 단연 최고였다. 참 빵이 맛있는 나라구나 싶다.
9월 하노이의 낮
베트남은 언제 가도 좋다. 특히 9월의 4박 5일간 여행은 날씨마저 웰컴 투 베트남 했다. 비록 도착하자마자 택시비 눈탱이를 정찬성 로우킥으로 맞았지만, 그대로 넉다운 되기엔 우리의 여행은 이제 시작이었기에 정신을 붙잡고 언제 어디서 다시 날아올지 모르는 훅에 대비해 가드를 올렸다.
베트남의 여러 도시를 다녀봤지만, 어쩌면 수도인 하노이가 가장 매력 없게 느껴졌던 것 같다. 뭔가 퐁당 거리는 맛이 없다고 할까. 그럼에도 좋았지만 다음에 또 베트남에 가게 된다면 가깝게 바다를 볼 수 있는 지역으로 가지 않을까.
하노이의 낮은 뜨거운 햇볕이 있지만 습하지 않고, 상의를 탈의한 남성들과 반대로 긴팔, 긴바지 착장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겨울만 빠진 삼계절이 공존하는 것 같다. 끊기지 않고 도로를 달리는 오도바이 무리도 진풍경이다. 한 대에 많게는 셋씩 엉덩이를 욱여넣고도 평온한 표정인 사람들, 그 사이를 모세의 기적을 일으키며 덤덤히 건너는 현지인들. 어디선가 꺄악 아악 소리가 난다면 볼 것도 없이 한국인이 길을 건너는 중이다.
한국에서는 한 그릇에 적어도 팔천 원이라는 말을 열두 번씩 해가며 하루 한 끼 꼭 챙겨 먹었던 쌀국수. 양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어설프게 돌돌 말아먹었던 반쎄오. 후식으로 마시는 코코넛 커피도 좋지만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로컬 과일을 사서 바로 먹는 재미가 조금의 희열마저 느끼게 했다. 뭐든 잘 먹고 잘 자는 백여사가 건넨 고수 스프링롤을 한 입 먹고는 핸드폰 배경화면을 고수 빼주세요 사진으로 바꿨지만, 그 무서운 고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천상의 맛이었다.
하아, 그립다. 저 양지머리 잔뜩 들어간 쌀국수.
4월 후쿠오카의 밤
여행 첫날밤만큼 설레는 게 있을까. 어쩌면 밤을 즐기러 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행지에서의 어둠이 기다려진다. 낯선 곳이 주는 어리숙함과 맛있는 음식, 그 지역의 새로운 술. 심지어 다음날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되니 설레지 않을 수 있나.
여행 첫날, 숙소 체크인만 얼른 하고 갔던 나카스 강. 포장마차 거리. 골든위크의 효과였는지 인파가 어마어마했다. 강변에 자리를 잡고 버스킹을 시작하는 귀여운 사람들. 가사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 내가 지금 여행을 왔구나 하는 실감에 흥겨웠다.
강 옆으로는 꽤 많은 포장마차가 쭉 이어져 있다. 두건을 쓴 사내들이 뭔가 일본어로 잔뜩 쓰여 있는 흰색 앞치마를 두르고 뿌연 연기 안에서 꼬치를 구워가며 걸걸하게 이랏샤이마세를 외치는 장관. 마치 어릴 적 봤던 만화책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한참 쳐다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으며 괜히 강 한 번 쳐다보던 그날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두어 바퀴쯤 돌다가 결국 숙소 근처 이자카야에 자리를 잡았다. 앉아서 먹을 자리도 없었지만, 아무래도 한 잔 할 땐 화장실이 바로 근처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니까.
그다음 날 밤, 그들의 밤문화가 궁금해서 갔던 꽤나 유명하다던 대형 클럽은. 뭐랄까.. 좋은 경험이었다. 혹시 다녀온 분들은 무슨 느낌인 지 공감할 듯싶다. 임여사와 둘이서 3일 동안 마신 하이볼이 두 병쯤 되지 않았을까 싶게 원 없이 마시고 온 후쿠오카의 밤은 꽤나 낭만이 있고, 맛있고, 음. 새로웠다.
9월 하노이의 밤
일명 맥주 거리로 불리는 이 곳. 타히엔의 밤은 낮보다 뜨겁다. 주말의 피크시간에는 빈 식당을 찾기도 힘들어서 자리가 나면 무조건 가서 엉덩이를 붙인다. 목욕탕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그 좁은 골목을 비집고 이동하는 인파를 보며 맥주를 마시다 보면 술에 취하는 건지, 바로 코앞에 피어오르는 바베큐 열기에 혼미해지는 건지 모르게 혼이 쏙 빠지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전구보다 사람 머릿수가 많다. 사방에서 원 모어 비어를 외치고, 한 발짝 내딛고자 부딪히는 것마저도 아임쏘리나 익스큐즈미는 없다. 그냥 가는 거다. 이런 여유가 늘 가능하다면 세계평화실현이 가능할 것 같은데. 여행지가 주는 여유는 사람들을 나이스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하노이의 밤은 후쿠오카의 밤처럼 낭만은 없었지만, 주머니에 있는 동을 다 털어서라도 시간을 붙잡고 싶은 재미가 있는, 어떤 의미로는 볼거리가 많은 시간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여행은 굳이 해외가 아니어도 좋지만, 여기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이국적인 어리숙함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