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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사 Feb 13. 2021

진정한 소간지

산업동물에게 정을 준다는 것.



모카 브라운 색상의 짧은 털. 촉촉한 콧구멍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핑크빛 혀. 샌드 베이지 아이쉐도우를 칠한듯한 깊은 눈두덩이와 그 안을 차지하고 있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까만 눈. 공작의 꼬리처럼 고혹적인 속눈썹을 가진 치명적인 매력의 주인공. 소(牛)


이 구역의 패셔니소타


진정한 소간지


이번 설에 고향집에 갔다가 진정한 소간지를 만났다. 곧 출산을 앞둬 무게중심이 낮고 양 옆으로 배가 볼록 나온 예비 엄마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사람 나이로 치면 청년부들이 모여있는 섹션에서 엄마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딸! 어서 와봐!

세상에. 클레오파트라 같은 앞머리에 멋진 미간 회오리를 가진 저 녀석을 발견하고 얼마나 깔깔거렸는지 모른다. 너 미용실 다녀왔냐. 

정신없이 웃는 나와 엄마를 멀뚱히 쳐다보며 멍청이 같이 눈만 끔뻑이는 게 너무 귀여워서 콧등을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정이 든다.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쳐다보다 지푸라기 한 주먹 먹여주곤 뒤돌아선다. 집에 와서도 사진첩에 잔뜩 들어있는 사진을 확대해보다가 피식피식 웃는다. 오늘이 지나면 이 녀석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소' 보다는 '소고기'로 불리며 평생을 고유번호로 살아가는 산업동물이기 때문에 언젠가 찾아올 이별에 담담해야 한다. 그게 생김새도 다르고 개성도 다른 이 녀석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 이유다. 



좌 : 미필, 우 : 예비역


우리 아빠의 또 다른 자식들.


축산 농가에서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송아지 시절에 뿔이 자라지 못하게 작업을 하는데, 우리 집 소들은 버펄로처럼 큰 뿔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엄마 말로는 아빠가 시기를 놓쳐서 작업을 못하는 거라는데, 한 두 마리 여야 그 말을 믿지. 아빠 나름대로 소의 프라이드를 지켜주는 작은 배려이지 않을까 싶지만 소 뿔에 받혀 사고 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마냥 소 프라이드만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걱정하는 걸 알면서도 안 변하는 걸 보면 참 우리 아빠인지, 송아지 아빠인지. 


눈이 크면 겁이 많다는 말을 증명하듯 소는 겁도 많고 낯도 많이 가린다. 주인 부부 외의 낯선 사람이 오면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그 큰 눈으로 흰자를 잔뜩 보이며 곁눈질하는 것도 사랑스럽다. 아빠가 밥을 주는 동안 나는 얼굴을 익혀줄 겸 축사를 돌아다니며 음매~ 한다. 그럼 소들이 일제히 머어~ 하고 따라 운다. 소 울음 성대모사는 자신 있다. 한창 돌아다니다 작고 마른 송아지 한 마리가 축 쳐져있는 걸 발견한다. 

아빠, 아기가 아픈가 봐 하고 물으니 이틀째 설사를 한다며 한 손에 익숙한 무언가를 들고 오신다. 국민 이온음료 포카리스웨트다. 목이 마르신가 했더니 곧 커다란 젖병에 옮겨 담고는 아기 송아지 입에 물리셨다. 설사로 탈수 증세가 온 송아지에게 빠르게 수분을 충전해 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3일 이상 설사를 하면 대부분 그다음 날 눈을 뜨지 못한다고 하셨다. 


한 병을 다 비울 때까지 결코 작지 않은 송아지를 부축하고 쓰다듬고 닦아주는 아빠를 보고 있자니 오만 감정이 밀려왔다. 늦은 새벽 이른 새벽 할 것 없이 축사에 가서 아픈 녀석들을 케어하는 송아지들의 아빠. 온 힘을 다해 돌봐온 송아지가 결국 눈을 감았을 때 자책하는 그의 얼굴은 썩 보기 힘들다. 아마 내가 생각하는 '속상함' 이상의 헤어릴 수 없는 수준의 감정일 것. 그것을 모두 감당하고 감수하는 것은 산업동물을 키우고자 하는 순간 따라오는 햇볕 아래 그림자 같다.



기사 출처 : News1



재방송으로라도 꼭 챙겨보는 '유 퀴즈 온 더 블록' 신축년 특집에 초코파이 한 봉지 준비하고 자리를 잡았다. 전문지식을 가지고 달려와 주시는 소들의 허준. 아빠가 의사보다 많이 뵙는 수의사 선생님의 현실적인 축산농가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건강하게 자라 달라는 말이 미안하게 느껴지는 어딘지 역설적인 산업동물과의 관계. 생계를 위해 기르기에 반려하지는 못하지만, 반려하는 동물 이상으로 온전한 사랑을 준다. 사랑을 받고 건강하게 키워진 소는 좋은 값을 안겨주고 떠나간다. 그의 말처럼 서글픈 면이 있는 것이다.


산업동물에게 정을 준다는 것, 육체노동에 더해지는 감정 노동일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오늘 저녁도 아빠는 추운 바람에 귀돌이로 무장하고 축사로 출근하셨고, 나는 송아지를 위한 포카리스웨트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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