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와서 한라산을 안 오르면 안 된다는 남편의 지론에 용기를 내어, 비교적 수월하다는 영실코스로 가기 위해 버스 환승장에 내렸다. 한라산 1100 고지를 지나가는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서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보니 여기저기서 배낭 메고 스틱까지 챙긴 부부들(우리도 그중 하나), 젊은 남성 혼자,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단단해 보이는 여성 등 여러 모습의 사람들이 버스를 타러 모여들었다.
드디어 버스를 타고 한라산의 1100 도로를 달려 영실입구에 내렸다. 거기서부터 출발인지 알았는데 매표소입구까지 2.5km를 걸어 올라가야 했다. 오르막길이었지만 데크로, 코코넛으로 짠 가마니같이 생긴 매트가 깔렸거나 시멘트길이어서 많이 힘들진 않았다. 그래도 옆 도로로 승용차나 택시가 빠르게 올라가는 걸 보면서 어차피 닦아놓은 도로면 여기까지 버스가 올라왔다 가도 되지 않나?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그러나 영실을 오르기 위한 준비 체조라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걸어 올랐다. 드디어 매표소에 도착했는데 표는 팔지 않고 큐알 코드 체크(코로나 시기였기에) 하고 무료입장으로 한라산 1280m에서 영실코스를 시작했다. 14년 전인가 성당 교우들과 이시돌 피정 센타로 수녀님과 함께 피정을 왔다가 한라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11월이라 마지막으로 여는 코스라고 했고 바람이 매우 세게 불었던 걸로 기억된다. 험하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세게 불어서 바위들을 딛고 오를 때면 바람에 날아간다고 아우성대는 귀여운 교우의 애교를 보면서 즐겁게 걸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데크로 계단을 만들어 편하게 올라갈 수 있기는 한데 모두 계단으로 이어지는 경사도가 심해서 산을 내려갈 때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우리는 스틱도 하나씩 짚었고 무릎 보호대까지 야무지게 해서 무리 없이 잘 올랐다. 중간중간 주위의 오름들과 어우러진 한라산의 멋진 모습에 사진 찍느라고 멈추고, 멋진 경치를 보느라 시간은 좀 걸렸다.
오백장군바위
병풍처럼 둘러 쳐진 바위와 그 옆의 오백장군바위를 보면서 '야~'하는 감탄과 함께 오백장군바위에 전해 내려오는 슬픈 전설에 마음이 서늘했다. 한라산의 황홀한 멋진 풍경을 눈에 담으려 애쓰며, 시원하게 불어주는 바람에 역시 덥지만 덥지 않게 산을 오를 수 있어 더없이 좋은 등반이었다.
윗세오름 근처는 이미 편안한 데크로 더 이상 힘들지 않았고 평지를 걷듯 펼쳐진 풍경들에 취해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하니 그곳은 새롭게 데크 공사를 하는지 파헤쳐지고 어수선한 모습에 조금 허탈했다. 아마 지금은 공사가 끝났을 테지만 그 당시에는 장소에 대한 기억이 세월의 색을 입으면서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기에 십수 년이 지난 것은 생각 못하고 아쉬움이 컸었다.
백록담 분화구의 거대한 바위를 보면서 데크길로 윗세오름대피소로 가는 길-추억의 라면도 먹을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더군다나 1시 반이 되면 윗세오름에서 남벽 분기점까지 더 이상 오를 수 없다고 했다. 처음부터 백록담 까지 올라가려면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로 미리 탐방예약을 해서 가야 된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 근처까지는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쉬웠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며 쉬다가 가려고 했지만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공사 중이라 할 수 없이 화장실만 들려서 이번에는 어리목 탐방로로 하산하기로 했다. 다행히 내려가는 길이 데크로 되어 있어 걷는 길도 편하고, 풍경도 예쁘다. 더구나 윗세오름에서 내려가는 길에 뒤로 보이는 한라산 백록담이 있는 분화구의 모습이 거대하고 우뚝한 돌산으로 웅장해 보여 남편은 연신 감탄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남편은 20대 초에 이곳에 초등교사로 근무하는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한라산 백록담까지 올라갔었다고 했다. 40여 년이 지나서 오니 많이 달라진 한라산 정상부위의 모습이 그때보다 너무 웅대해 보인다고 연신 감탄이었다. 분명히 기억의 굴절이 있을 테지만 어느 쪽에서 한라산 정상부위를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풍경에 감탄이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된 편한 길은 없는 듯 1700m 윗세오름에서 내려오는 데크길이 끝나자 끝없이 돌길로이어 지고, 투박한 자연 그대로의 길을 데크는 아니지만 계단식으로 조성한 숲길이 쉽지 않아 우리가 한라산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내려오는 중간중간에 쉬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또 하나 숲길을 걸을 때면 아름다운 새소리에 힘든 것도 잊게 되는데 이상하게 새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 가끔 까마귀 우는 소리는 들렸지만 한라산에 산다는 동박새, 휘파람새, 금박새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 이상했다. 하지만 산을 1000m까지 내려오니 그제야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새들도 고지가 너무 높으면 살기가 힘든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