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shtown, 그리고 Northern Liberties
필라델피아 여행의 가장 큰 목적들 중 하나는 라콜롬베 카페를 가 보는 것이었다.
시애틀에 살면서 안타까운 점들 중 하나를 뽑자면 인텔리젠시아, 블루보틀, 그리고 라콜롬베 카페들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나마 인텔리젠시아와 블루보틀은 여행지 이곳저곳들에서 가 볼 기회가 있었지만 라콜롬베는 아직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카페였기 때문에 치즈스테이크는 못 먹어도 상관없지만 여기는 꼭 가야겠다고 벼르고 있는 중 드디어 라콜롬베 카페가 있는 동네로 여행을 가볼 날이 왔다.
처음으로 Center City를 거치지 않는 여행길이 낯설었지만 한적함이 나쁘지 않아 여유 있게 한 시간 가량을 걸어 목표했던 카페로 갔다. 미국의 어느 힙한 동네가 그렇듯, 거리에선 사람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라콜롬베 카페 앞은 이미 주문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밖에서는 안의 규모가 가늠이 잘 되지 않았는데 한참을 기다려 안에 들어가자마자 큰 규모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It's smaller on the outside!" 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규모였기 때문에 안에 앉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 때로부터 대략 세 달 정도가 지났는데 지금은 Dine In이 허용되었을지 모르겠다.
살짝 쌀쌀한 날씨였지만 카페 근처의 예쁜 벤치에 앉아 연어 샌드위치에 라떼를 곁들이니 몸이 좀 녹는 기분이었다. 근처의 식당에서 브런치를 즐길 예정이었기 때문에 원래는 카페에서 빵을 사지 않으려고 했는데 식당 주변을 아무리 기웃거려도 도무지 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인스타그램으로 디엠을 보내 보니 당분간 브런치는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쉽게 브런치는 포기하고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시켰다. 큰 기대 없이 시킨 메뉴였는데 생각보다 훈제연어가 풍성히 들어가 있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괜한 오기가 생겨 원래 브런치를 먹으려 했던 식당이 저녁에 오픈할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일단은 Fishtown을 돌아다녀 보자는 생각에 주변을 검색해보니 중고 음반 매장이 있길래 그곳을 첫 번째 목적지로 정했다.
꼭 이곳에 가야 할 만큼의 특색이 있는 공간은 아니지만 중고 음반 매장만이 주는 안락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나처럼 여행지에 대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 음반을 구매하는 사람이라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이 곳에서 시간을 보내도 괜찮을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는 들어 봐야지, 들어 봐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막상 아직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뮤지션들의 음반을 구매하는 것을 좋아한다. 혹은 그냥 앨범 표지를 보고 끌려 구매하기도 하고. 나 같이 충동을 즐기는 사람에게 중고 음반 매장은 무척이나 반가운 공간이다.
가게 주인이 다른 손님들과 처음 들어보는 뮤지션들에 대해 열 띈 토론을 벌이고 있는 사이 벤 폴즈 파이브, 아레사 프랭클린, 모스(모세) 앨리슨, 윌 존슨(순전히 음반 표지가 끌려서 샀다) 등등의 음반들을 집어 계산하고 나와 바로 근처에 있는 'Corridor Contemporary'라는 현대 미술 갤러리로 향했다.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대체로 여행을 갈 때마다 그 도시의 미술관을 들르는 편인데, 코로나로 인해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닫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쉬워하던 찰나 이곳에 작게나마 갤러리가 있다는 희소식을 접하니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작품들에 담긴 의미를 깊게 고찰하고 느끼지는 못한다 해도 예술 작품들을 보는 것, 그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 있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 시간이 지나치게 남아돌고 있었기 때문에 갤러리를 여유 있게 둘러보았다. 세 달이나 지난 탓에 기억나지 않는 작품들이 많지만, 위의 Book of Life라는 화려한 작품과 에어캡 (뾱뾱이)을 통해 만든 그림 (안경을 쓴 여성이 그려진 그림)이 인상에 깊게 남았다. 좀 더 길게 감상을 남기고 싶지만 지식이 부족하니 영 뭐라 감상을 말하기 어렵다. 흑인 아티스트 분들의 그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꽤 한참을 바라봤었다. 사진을 찍어 놓은 것이 없어서 아쉽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작품들을 전부 볼 수 없는 미술관과는 다르게 작은 사이즈의 갤러리에서 몇 시간이고 있을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바로 나와서 다음 목적지를 열심히 찾아보았다. 어디 다른 카페라도 없나 하고 찾아보는데 마침 걸어서 대충 20분 정도의 거리에 또 다른 카페가 있길래 큰 고민 없이 바로 발을 옮겼다. 카페를 들르고 대충 주변 구경이라도 좀 하다 돌아가면 딱 레스토랑이 오픈하기 직전이 되는 완벽한 (?) 일정이었다.
카페를 향해 걷다 보니 오히려 Fishtown보다 규모가 크고 활기찬 동네의 모습이 펼쳐졌다. 여긴 대체 어딜까 궁금해하며 걷는 도중 'Trunc'라는 편집샵을 하나 발견했다.
널찍한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다 보니 먹을 것처럼 생긴 게 보여 혹시 마쉬멜로우 같은 건가, 하고 기대하며 설명을 읽어봤는데 알고 보니 샤워할 때 바닥에 두면 녹으면서 향이 올라오는, 샤워밤 비스무레한 제품이었다. 이런 곳에 들어가면 꼭 뭔가 사서 나와야 마음이 편한 성격이라 편집샵에서 샤워밤을 구매하는 김에 이 동네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Northern Liberties라는 답을 해주시며 겸사겸사 제품 사용법도 알려주시고, 좋은 여행을 하라는 말을 들으며 다시 밖으로 나왔다. 검색해보니 Northern Liberties라는 동네 또한 소위 '힙스터 핫스팟'이라고 불리는 곳이라고 한다. 카페를 향해 걷다 보니 어디선가 비눗방울이 날라 오길래 주변을 열심히 둘러봤는데 알고 보니 맥주 양조장의 2층 테라스에 비눗방울이 나오는 기계?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어 비눗방울이 계속해서 거리를 장식했다. 영상을 찍었는데 지운 것 같아서 아쉽다.
막상 카페에 도착하고 하니 커피를 마실 기분이 나지 않아 대충 카페의 시그니처 디저트라는 '카놀리' (까눌레와는 다르다)를 동생에게 선물해줄 겸 몇 개 사서 들고 나와 도로 식당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날이 빨리 어두워지는 탓에 4시를 살짝 넘긴 그다지 늦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날이 조금 어두워져 있어 발걸음을 조금 서둘렀다. 혹시라도 레스토랑에 웨이팅이 길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오픈 전부터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예약을 한 것으로 보이는 한 가족 이외에는 없었다.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혼밥에는 익숙해져 있지만, 그래도 본격적인 레스토랑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이 익숙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에게 괜히 '아무래도 혼자 오는 사람이 많지는 않죠', 하는 시시한 질문을 던지며 어색해했지만, 따뜻한 히터가 틀어지고 종업원의 추천으로 주문한 와인도 조금씩 홀짝이다 보니 몸과 함께 어색함도 녹는 기분이었다. 아, 언급할 기회를 놓쳤는데, 아래의 사진에서도 나오듯 레스토랑의 이름은 'WM.Mulherin's Sons'이다.
사실 스테이크를 먹을지 파스타와 전채요리를 먹을지 한참을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재정상태가 재정상태인지라 어쩔 수 없이 후자를 시켰다. 전채요리를 꼭 시키고 싶었으니 어쩔 수 없는 타협이었다.
어떤 식당을 가든 컬리플라워 전채요리가 있으면 무조건 시키는 편이다. 컬리플라워 자체는 잘 먹지 못하는데 컬리플라워 전채요리는 라스베가스에서 신세계를 경험한 이후로 계속해서 시키게 된다. 파스타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와인의 맛이 환상적이었다.
Fishtown에서의 하루는 어쩌면 여행이라기엔 지나치게 소소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과연 필라델피아 여행을 계획할 때 이 글을 참고를 할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미국으로 놀러 올 때보다는 미국 내 여행을 계획하거나 혹은 필라델피아에 온 지 얼마 안 된 분이 보시면 조금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만약 필라델피아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다면 Fishtown 근처에서 하루를 보내지는 않아도 되지만 이곳의 라 콜롬베 카페는 꼭 들렀다 가라고 추천하고 싶다.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분위기와 맛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