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 Angeles (17.08.13 ~ 17.08.19)
파도소리와 갈매기들의 날갯짓이 접하는 방향을 따라 걷던 내 눈앞에 새하얀 모래사장과 새파란 바다가 만들어내는 한 폭의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는 언제 오더라도 늘 넉넉한 위안을 준다. 오늘처럼 해가 쨍쨍한 날은 당연하고 비가 오거나 바람이 몰아쳐도, 그 흔들림 속에 고요함을 머금은 깊고 거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바다를 언제 어디서 처음으로 봤는지 떠올려봐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다만 그 이후로 고등학교 수학여행에서, 군 휴가 때 갔던 가족여행에서, 동네 친구들과 함께 간 내일로에서, 그리고 지금. 인생 곳곳에 온갖 바다의 짠 내음을 새기며 불안정한 내 존재를 의탁하고자 했다. 시간과 공간은 달라도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바다다. 어쩌면 태어나 처음 본, 기억 속에도 남아있지 않은 그때의 바닷물이 흐르고 흘러 지금 내 눈앞에 와있는지도 모른다. 그리 안정할 것이라 믿었던 바닷물도 나처럼 갖은 파도에 쉴 새 없이 부딪히며 떠밀려온 존재인 것이다.
아직 버거운 시차의 존재가 아침부터 날 무겁게 짓누른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강행군으로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결국 늦잠을 피해 갈 순 없겠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열린 방 문에 놀라 남은 잠이 싹 달아나버렸다. 방해금지 팻말을 걸어 둔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청소부 아주머니는 속옷 차림인 날 보고도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그저 호탕하게 웃으며 본인 일만 묵묵히 하시곤 나가셨다. 이건 또 다른 형태의 개인주의인 것일까? 뭐, 딱히 보기 좋은 구경거리도 아니었을 텐데 격한 반응에 감사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음, 아니다. 그냥 서로 사인이 안 맞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UCLA에서의 복에 겨운 캠퍼스 생활이 조금은 수월해졌다. 산뜻하게 샤워를 마치고 숙소 옆 건물 지하에 위치한 식당으로 내려와 카드키를 보여준다. 입구를 지키는 직원과 웃으며 반갑게 아침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잡는다. 다양하게 차려진 뷔페 음식들 가운데 먹어보고 싶은 빵과 계란 요리들, 파스타와 샐러드 등을 입맛에 맞게 골라 자리로 돌아온다. 특히 한국에서 시켜 먹는 것 보다도 더욱 풍부한 치즈의 풍미가 살아있는 피자는 매끼마다 빼먹지 않고 가져왔다. 식사를 마치면 식당 주위로 잘 가꿔진 오솔길을 가볍게 산책하며 소화를 시킨다. 군 휴학을 제외하고도 거의 6년간, 왕복 3시간에 달하는 통학시간을 감내해온 내가 어쩌면 입학 전 가장 꿈꿨던 캠퍼스 라이프의 모습이란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
4년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같은 캠퍼스의 대학원 진학을 결심한 건 단순히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휴학 없이 앞으로 달리기만 하던 길에서 마주한 번아웃은 마땅한 치료제가 없었고 그와 동시에 다른 동기들과 비교되는 가난한 대학원생의 삶에 지쳐갔다. 결국에는 박사 진학과 취업 사이에서 돈을 선택하게 되었고 졸업이 반년 정도 남았으니 계획대로만 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직장에 다닐 터였다. 이제 졸업과 취업을 모두 해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이 시점에 UCLA 교정을 유유히 걷고 있는 상황이 다소 생뚱맞긴 해도, 덕분에 열정 가득했던 예전의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내 선택의 결과일 뿐이고 난 그로 인해 주어진 이 상황들에 맞게 최선을 다하면 되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모든 걸 다 잊고 이 여정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에서 지하철로 몇 정거장만 지나면 곧바로 한강변을 거닐 수 있었다. 강의가 빨리 끝나는 날 선배나 동기들과 우르르 몰려가 먹는 한강 치맥이야 말로 캠퍼스 라이프 중 손꼽는 낭만의 순간이었다. 만약 UCLA의 학생이었다면 이런 낭만이 더욱 배가되지 않았을까 싶다. 버스로 조금만 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산타모니카의 해변이 나를 바닷바람으로 감싸 안으며 격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신이 날 상황에 맨발이 되어 모래사장으로 뛰어든 나는 곧바로 되돌아 나와 발바닥을 어루만져야 했다. LA의 특이한 기후는 따가운 햇빛만 피하면 서늘하다 못해 춥기까지 했지만 그늘 없이 달궈진 모래들은 그 사정이 달랐다.
그럼에도 현지인들은 전혀 아랑곳없이 그 뜨거운 모래사장을 밟으며 비치발리볼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정도가 심하기에 발바닥이 나랑은 다른 구조인가 싶었다. 그저 혀를 내두르며 그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전혀 뜨겁지 않은 방법으로 바다를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는 광활한 태평양의 수평선을 향해 지어진 거대한 부둣가가 있었다. 여느 관광지처럼 들어선 여러 식당과 놀이기구들을 지나 부두 끝까지 오자 한층 더 거세진 해풍을 시원하게 만끽할 수 있었다. 정면만 바라본다면 나 홀로 바다 한가운데에 떠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다 뒤를 돌아 난간에 기대면 좌우로 끝도 없이 길게 뻗은 모래사장을 바다 시점에서 볼 수도 있었다. 이렇게 긴 해변은 난생처음이었다. 마치 이 바다의 정복자가 된 기분이랄까.
온통 자유롭기만 했던 오전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학교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얼른 점심을 먹고 오후에 있을 포스터 전시를 위해 정해진 학회 일정에 참가해야 했다. 여행의 환상이 깨지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한다는 삭막한 생각은 않기로 했다. 그냥 여행의 끝에 늘 그렇듯 당연한 일상이 찾아온 것이고 그 일상은 또 어느 틈에 여행으로 바뀌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