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 Angeles (17.08.13 ~ 17.08.19)
초등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족들과 놀러 간 롯데월드에서 두 살 터울의 동생과 인파를 뚫고 달려간 곳은 '후룸라이드'라는 놀이기구 앞이었다. 모두가 레이저쇼에 한눈이 팔렸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생각보다 줄이 길었다. 그냥 돌아가야 하나 망설이던 그 순간 직원분이 손가락으로 숫자 2를 표시했고 나와 동생은 재빨리 손을 들어 곧바로 놀이기구에 탑승할 수 있었다. 통나무 모양 보트에 4명이 타고 물길을 헤치며 급류를 타는 평범한 놀이기구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높은 곳에서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내려오는 구간을 통과하는 순간 밖으로 튕겨 나갈 것 같은 공포감을 덜컥 느낀 것이다. 당장 내리고 싶었으나 아직 하강코스가 한차례 더 남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고소공포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이날 이후로 놀이공원에 가면 높은 곳에 올라갈 일이 없는 회전목마나 범퍼카를 찾게 되었다.
'놀이'라는 것은 이름처럼 당연히 즐거워야 한다. 단순히 공포의 대상들이 널려 있는 공간을 선호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놀이공원이 그런 존재였다. 그럼에도 이 많은 인파 가운데 줄을 서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LA에 왔다면 꼭 가봐야 하는 유명 관광지들 중에서도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꼽은 것은 친숙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중학생 때 오사카에 있는 또 다른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다녀온 적이 있기에 나름의 향수도 있었고 일본과 비교해서 미국은 어떻게 꾸며져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할리우드의 본고장 LA에 세워진 영화 테마파크인 만큼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나 아닌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만큼 늘 인파가 몰리는 곳이기에, 개장시간에 맞춰 왔어야 했고 당연히 예매도 필요했지만 했을 리 없는 나였다. 자유이용권 가격이 당시 기준으로 120달러였고 나는 당당히 100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건넸다. 영문은 잘 모르겠지만 매표소 직원은 내가 건넨 지폐를 상당히 신중하게 살펴보고 손가락으로 수 차례 튕겨보더니 이내 만족한 표정으로 입장권과 거스름돈을 주었다.
입장하자마자 팸플릿 하나를 집어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가장 안쪽에 위치한 해리포터의 성에 도착했다. 가득 들어찬 사람들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영화 속 낯익은 거리를 그대로 재현해둔 모습들에 두 눈이 반짝였다. 호그와트로 떠나는 열차에선 증기가 끓어올랐고 마법 지팡이를 파는 가게에서는 손님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가게 주인의 마법쇼가 펼쳐졌으며 길거리 게시판에는 아즈카반에서 탈출한 죄수들의 움직이는 포스터 사진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지나서 도착한 길 끝에는 단단한 암반 위에 세워진 호그와트 성이 그 웅장한 위용을 뽐냈다. 성 안으로 들어가면 이곳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어트랙션인 'Harry Potter and the Forbidden Journey'가 있었다. 3D 홀로그램을 이용한 무섭지 않은 놀이기구라 꼭 한번 타보고 싶었지만 대기시간이 무려 3시간이었다.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이미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과감히 포기하고 성 내에 있는 기념품 숍을 구경한 뒤 빠져나왔다. 대신에 성 앞에 있는 'Flight of the Hippogriff'라는 작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고소공포증이 심한 나로서는 그리 무섭지 않은 이 정도의 어트랙션이면 기분을 내기엔 충분했다. 다음 목표를 찾아 이동하려는 찰나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있기에 가보니 영화 속에서 본 버터 맥주를 팔고 있었다. 날도 더웠고 맛도 궁금했기에 한잔 주문해 마셔보니 이름만 맥주일 뿐 진한 캐러멜 시럽 같은 게 들어간 달달한 음료였다. 너무 달아서 혀가 얼얼할 정도였고 그 단내를 맡고 몰려든 벌 때문에 가판대 한쪽에서는 직원이 맥주컵으로 벌을 잡고 있는 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비록 내 스타일의 맛은 아니었지만 더위를 식히려고 한 모금씩 홀짝대다 보니 어느덧 바닥을 드러냈다.
해리포터의 마을을 벗어난 뒤에는 이곳저곳 구경하면서 최대한 무섭지 않은 어트랙션만 찾아다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개 난이도가 낮을수록 대기시간이 짧았다. (나와는 달리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포와 흥미가 비례 관계인 것 같았다.) 덕분에 피크 시간대에 왔는데도 나름 쏠쏠하게 대여섯 개 정도의 어트랙션들을 즐길 수 있었다. 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이곳의 정체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Studio Tour'였다. 약 40분 동안 수륙양용버스를 타고 유명 할리우드 영화의 실제 촬영지들을 돌아보며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경험을 선사하는 가이드 투어이자 동시에 4D 체험형 놀이기구였다. 한번 타보고 나니 왜 이 테마파크의 이름을 유니버설 스튜디오 할리우드(Universal Studios Hollywood)로 지었는지 납득이 갔다.
비싼 입장료를 지불한 것에 비하면 짧긴 했지만 다양한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보는 색다른 시간이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퇴장해 바깥으로 나가는 무료 셔틀에 올라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이 영화라면 나는 과연 어떤 주인공일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력적이다 또는 다소 밋밋하다 왈가왈부하는 주위 사람들의 평가가 엇갈릴 것이다. 슬픈 일이겠지만 주연이 아니라 비중 없는 조연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테고. 분명한 건 어떤 모습이건 간에 내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 대학 동기중 하나는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주인공에 완전히 이입하기 때문에 재밌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나도 지금의 삶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주인공 놀이를 즐기는 중이다. 앞으로도 더욱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이 내 삶이란 영화 속에서 상영될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내 존재의 이유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