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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란 Oct 02. 2021

거리에서

Los Angeles (17.08.13 ~ 17.08.19)

  나를 조금 멀리서 바라보고 싶었다. 남들은 부럽다고 말하는 단단한 자존감의 실체는 사실 온갖 고민과 번뇌로 점철된 고통 덩어리였다. 그러다 보니 나의 삶을 내 눈이 아닌 외부의 시선으로 관망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차고 넘칠 즈음,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걷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그 걸음들이 모여 여행이 되었고 추억으로 얼룩졌으며 여러 조각의 글로 남았다. 그 퍼즐을 맞춘 결과는 언뜻 보기에 평범한 여행기 같았지만 실상은 주위의 여러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이었다. 여정이 길어질수록 내가 속한 공간으로부터 천천히 분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하나둘, 나와 연결된 끈들이 속절없이 끊어질 때마다 조금씩 자유라는 녀석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진정한 '자유란' 어떤 것일까? 이 고민은 나의 또 다른 자아이자 이름이 되었다.




  LA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를 묻는다면 단연코 할리우드일 것이다. 이틀 전, 이 할리우드를 찾아 나선 여정에서 정말 많은 거리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UCLA 정문 근처에서 무작정 버스를 타고 마음 가는 곳에서 내렸다. 그 근처를 배회하다 볼거리를 찾아 북쪽으로 걷다 보니 우뚝 솟은 하얀 시계탑을 만나게 되었다. 파머스 마켓(The Original Farmers Market)은 이름 그대로 지역 농민들이 물건을 사고팔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시장처럼 각종 음식과 잡화를 파는 작은 가게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바쁘게 음식을 준비하는 노점상 주인들과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 세심하게 살펴보는 손님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마치 살아 숨 쉬는 유기체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잠시 머물다 가지만 기회가 된다면 이 공간에 동화되어 현지의 다양한 감정들을 느껴보고 싶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파머스 마켓에서 옆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 보니 분수와 정원이 꾸며진 아름다운 공간이 이어졌고 사람들은 레스토랑의 야외석에서 스테이크와 화이트 와인을 음미하고 있었다. 복합 쇼핑몰인 더 그로브(The Grove)였다. 수많은 브랜드 숍과 가게, 영화관 등을 제치고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엉뚱하게도 주차 타워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 보니 미국에 온 나를 반기듯 거대한 성조기가 새파란 하늘 아래 펄럭이고 있었다. 우연히 발길이 닿은 공간이었지만 주변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숨겨진 명소였다. 


  주차타워를 나와서 다음으로 들른 곳은 '반스앤노블(Barnes & Noble)'이라는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이었다. 책이 주는 종이의 질감과 냄새, 그리고 특유의 안정감이 좋아서 어디를 가더라도 서점이나 도서관을 꼭 찾곤 한다. 개인적으로도 책에 대한 로망이 많다. 나중에 집을 사면 방 하나를 큰 서재로 만드는 것과 언젠가는 내가 쓴 책을 출판해 보는 것, 그리고 직장에서 은퇴한 후 소소하게나마 익명의 작가로 활동해보는 것 등이다. 내가 걷는 이 여정 하나하나가 글자로 바뀌어 문장을 이루고 책으로 엮여 서점에 꽂힐 날도 언젠가 찾아오지 않을까?


  또다시 장소가 바뀌었고 하늘이 아닌 땅에 별이 가득한 거리를 거닐었다. 드디어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Hollywood Walk of Fame)에 입성한 것이다. 바닥에 박힌 커다란 별들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인사들의 이름과 그들이 공헌한 분야가 새겨져 있었다. 재밌는 것은 영화, TV, 음악, 라디오, 연극의 다섯 분야를 각각 카메라, 안테나, LP, 마이크 그리고 가면으로 상징화한 점이었다. 유명세만큼이나 내가 걸어본 LA 거리들 중 가장 붐볐다. 수많은 관광객과 각종 히어로 및 유명인 코스프레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거리답게 이국적인 형태를 한 여러 극장들과 유명한 영화 관련 테마의 기념품 숍들도 두 눈을 즐겁게 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중국풍의 극장 앞마당에 가면 수많은 발자국과 사인들을 찍어 넣고 굳힌 바닥돌들 사이에서 반가운 우리나라 배우분들의 이름도 찾을 수 있었다.




  그리피스 천문대에 오르기 전 가볍게 둘러봤던 그 거리들을 오늘 다시 찾아온 까닭은 남아있는 아쉬움을 탈탈 털어 버리기 위해서였다. 지난번과는 반대방향으로 이동하며 다시금 찬찬히 눈에 거리의 모습들을 새겨 넣었다. 여행 온 지역의 골목 구석구석까지 두 발로 꼼꼼히 걸어봐야 성에 차는 나였다. 단지 눈으로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공간이 풍기는 내음과 발아래로 느껴지는 지면의 촉감까지 오롯이 느껴야 비로소 여행은 완성되는 것이라 믿었으니까. 그마저도 모자랐는지 할리우드 왁스 뮤지엄(Hollywood Wax Museum)에 들러서 실물 크기의 밀랍인형들과 그 곁에 놓인 관련 소품들을 들고 셀카를 찍으며 하루 온종일 영화 속에 물씬 빠져들었다.


  저녁 어스름이 지는 하늘로 솟은 시계탑은 이전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파머스 마켓에 수많은 가게들 중 지난번에 눈여겨본 곳에 가서 메뉴를 골랐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그냥 가판대에 깔아 놓은 음식들이 가장 맛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주문한 건 'Lula Kebab'이라는 음식이었는데 꼬챙이에 꽂아 구운 고기에 난(Naan)과 구운 토마토, 향신료를 뿌려 잘게 썬 야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크림이 곁들여 나왔다. 점심때 버터 맥주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터라 배가 많이 고팠기에 망정이지 사실 두 번은 먹기 힘든 맛이었다. 고기는 짰고 향신료는 너무 강했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크림은 그냥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곳 분위기에 녹아들어 그 정취를 한껏 느껴본 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현지인들 사이에 섞여 그들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경험이니까. 난 심히 자유로웠다. 낯선 이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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