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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란 Sep 19. 2021

환상의 나라, 라라랜드

Los Angeles (17.08.13 ~ 17.08.19)

  환상의 나라를 뜻하는 '라라랜드(La-La Land)'는 여기, LA의 별명이자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 유명 뮤지컬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여행 당시의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남녀 주인공이 아름다운 야경을 배경으로 함께 춤을 추는 곳이 지금 와있는 그리피스(Griffith) 천문대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할리우드 거리를 정처 없이 걷던 내가 어느 틈에 여기까지 올라와 한층 더 가까워진 할리우드 사인(Hollywood Sign)을 바라보게 된 것일까? 여정의 전말에 관계없이 황혼은 눈이 부셨고 나는 아직 본 적도 없는 영화 속 두 남녀의 춤사위를 상상하며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렸다.




  낯선 곳으로의 여정이란 언제나 특별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당연히 앞으로 겪게 될 다양한 두근거림을 기대했지만 실상은 숙소 입성까지 겪은 온갖 우여곡절과 16시간의 시차로 인한 극도의 피로가 주였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몰아쳐 쉴 틈 없이 걷게 만드는 원동력은, 운 좋게 잡은 기회를 단 1초라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본능이 아니었을까? 조금의 여유도 없이 별들의 거리를 걷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건 어떤 이질적인 공간이 만들어내는 풍경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쇼핑몰 한가운데에 원형 광장이 있고 그 끝에 닿으면 거대한 문처럼 뻥 뚫린 건물이 솟아 있었다. 그 구멍 사이로 구름 한 점 없는 LA의 파란 하늘이 마치 그 의미를 도통 모르겠는, 하나의 색으로만 수없이 덧칠해진 현대 미술 작품처럼 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곳에서 풍기는 특별한 분위기가 좋았다. 건물의 외형이나 새겨진 조각들도 미국이 아닌 동남아나 이집트가 떠오르는 형상이었다. 이주민들도 많이 사는 도시이다 보니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머리카락과 피부의 색, 키와 체격들도 전부 가지각색이었다. 이상하기보다는 생소했을 뿐이었고, 인종이나 동서양의 차별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저 알록달록했다. 이 다양함 속에서 다시금 나라는 존재도 그저 평범한 인간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되새길 수 있었다. 내가 특별히 부족하거나 모자란 게 아니라 모두가 이렇게 다른 거니까. 여유가 생기니 그 틈을 파고드는 잡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물어가며 현실감각을 흐린다. 내가 여기에 왔다는 사실마저 퇴화되어 사라지려는 찰나, 눈앞에 선명한 할리우드 사인이 이 공간이 어디인지를 다시금 일깨웠다.


  멈춰 선 두 발에 다시 시동을 걸어서 이 거리의 끝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 도달했다. 아직 저녁을 먹기엔 살짝 이른 시간이었기에 느려 터진 인터넷을 붙들고 어디를 더 갈 수 있을지 검색하던 중이었다. 마침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가 볼 만한 곳이 있다고 해서 큰 고민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이 영화, 라라랜드의 촬영지이자 야경 명소인 그리피스 천문대임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영화의 거리답게 천장이 온통 영화 필름 모양의 조형물로 빼곡히 채워진 지하철 역을 지나 천문대로 오르내리는 순환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도심을 달리던 버스는 어느 순간 들어선 산길을 돌고 돌아 사방이 탁 트인 고지대 어느 공간에 정차했다. 너른 광장을 가로지르는 길 끝에 세 개의 돔이 봉긋 솟은 흰 건물이 이제 막 노을로 물든 하늘빛과 어우러져 장관을 선사했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푸른 잔디로 덮인 광장을 천천히 걸어보았다. 인공적으로 반듯하게 다듬어진 완전한 좌우 대칭형 건물의 흰 벽에 대자연이 만들어 낸 다양한 빛깔이 칠해지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취해서. 즉흥적으로 들린 탓에 매주 월요일이 휴무라는 사실을 천문대 문 앞에 와서야 알았다는 것만 빼면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무료로 둘러볼 수 있다는 내부 관람은 불가했지만 건물 뒤쪽 낮은 담장에 기대서 내려다보는 LA의 모습은 이곳에 온 많은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5박 7일의 LA 여정 중 내가 들른 가장 높은 장소였고, 그 때문인지 나를 답답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뻥 뚫린 듯 시원해졌다.


  눈앞에 펼쳐진 초저녁의 도시를 바라보며 내용도 모르는 영화 속 주인공들을 떠올렸다. 누구라도 이런 공간에선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영화의 끝에서 그 사랑은 이루어졌을까? 아니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될까? 동시에 너무도 서툴러서 엉성하게 끝나버린, 이제는 떠올리기도 싫은 첫사랑의 기억이 스쳐갔다. 돌이켜보면 내겐 사랑도 연애도 지속하기 어려운 임무였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종잡을 수 없이 급변했고 세심함이 더욱 요구되는 부분에서는 항상 한 박자 늦게 반응했던 것 같다. 다음번엔 더 잘해 보이겠다 다짐해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에 맞게 리셋되는 바람에 늘 내 사랑의 종착지는 아픔이었다. 남는 것이라고는 추억이라 포장된 아련한 몇 장면과 그 사람이 차지했던 내 마음속 공간만큼 큰 고통뿐. 그 상처가 아물어 더욱 단단해지는 법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너무 딱딱하게 굳어져 섬세한 사랑의 감촉을 다시는 못 느끼게 되는 건 아닌지 늘 두려웠다.




  몇 년이 흐른 지금의 난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생겼고 라라랜드의 결말도 전부 알아버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모든 게 서툰 나였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의 부족함을 자각하게 하는 그 순간들이 떠오른다고 해도 이제는 의연하게 미소 지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초행길의 위험 때문에 보지 못한 그날의 야경을 상상하며 'City of stars'를 들으면 주위가 순식간에 LA의 밤으로 바뀌는 마법이 펼쳐지기에.


I don't care if I know
Just where I will go
(어디를 가게 되더라도 상관없어요)

Cause all that I need is this crazy feeling
A rat-tat-tat in my heart
(심장을 쿵쿵거리게 하는 이 미칠 듯한 감정만 있다면요)

I Think I want it to stay
(난 이대로 있고 싶어요)

City of stars
Are you shining just for me?
(별들의 도시여, 나만을 위해 빛나고 있나요?)

City of stars
You never shined so brightly
(별들의 도시여, 이토록 환하게 빛난 적은 없었죠)


                                                                       Ryan Gosling & Emma Stone - 「City of stars」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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