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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란 Sep 05. 2021

푸른빛의 승리자들

Los Angeles (17.08.13 ~ 17.08.19)

  학회 개최 장소가 LA로 정해졌을 때 가장 먼저 따져본 것은 LA 다저스(Dodgers) 경기 직관이 가능한지 여부였다. 야구팬이라면 누구라도 사는 동안 한 번은 메이저리그 구장 입성을 꿈꿀 것이다. 더군다나 2017년은 류현진이라는 걸출한 한국인 투수가 모두가 끝이라고 여겼던 어깨 부상을 극복하고 돌아와 자기 공을 뿌리기 시작하던 해였다. 내가 지금 밟고 서있는 이 땅, LA에서 말이다. 일단 초행길 저녁 경기는 위험할 것 같아서 낮 경기만을 추렸고 다행히도 경기 관람이 가능한 날이 딱 하루 있었다. 문제는 LA 홈에서 열리는 그 유일한 낮 경기가 하필 입국일인 오늘이라는 것이었다. 숙소에 들러 짐을 놓고 가기에는 동선도 복잡하고 시간도 촉박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욕망에 눈이 먼 나는 어느새 그 무거운 캐리어를 이끌고 LA 다저스의 홈구장, 다저스타디움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실 야구는 나에게 있어 애증 그 자체인 스포츠다. 스무 살에 맞이한 첫 대학 생활에서 선택적 인싸가 되기 위해, 그리고 시험 족보를 얻기 위해서는 무조건 과 동아리 하나를 들어가야 했다. 다양한 선택지 중 굳이 야구를 꼽은 건 단순히 예비대학이라고 불리던 선배들과의 첫 술자리에서 같은 조였던 이유가 8할이었다. 당시 선후배 개념이 전혀 없어 인간관계에 서툴고 적응도 못하는 나를 적극적으로 끌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모자라 보이겠지만 그때의 나는 인격적으로 정립이 필요한, 내적으로 너무도 불완전한 존재였다. 여기에 타고난 체육적 센스가 1도 없던 내가 매주 목요일 정기 연습과 주말 간 치러지는 친선 경기에 참여하는 건 그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한 번씩 저지르는 실수에 농담 반 진담 반 쏟아지는 질타를 맞닥뜨리고 나면 그나마 남아있던 자존감마저 바닥을 쳤다.


  그런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1학년을 마치자마자 입대라는 극약처방을 선택했다. 적응의 난이도가 대학교와는 차원이 다른, 못하는 사람은 철저히 짓밟히는 조직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과정은 참담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다.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속성으로 배우기에 최적화된 곳이었으니까. 제대 이후 내 삶의 목표는 강박증처럼 오로지 '극복', 이 두 글자였다. 그럼에도 야구만큼은 여전히 극복하기가 힘들었다. 타석에서 느끼던 나약함 때문에 승리자가 되지 못했던 매 순간들은 파란색 유니폼과 함께 기억 저편에 처박아 두었다. 다시는 경기장에 서지 못했고 그저 보는 것으로 그 갈증을 해소해왔다. 내가 지금까지도 야구를 끊지 못하는 속사정은 이랬다.




  LA 시내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도착한 어느 한적한 동네부터 기나긴 고행이 시작되었다. 경로만 봤을 때는 캐리어를 끌고도 충분해 보였지만 큰 오산이었다. 본디 지도라는 것이 평면상에 전후좌우만 고려해 놓은 것이기에, 정보도 없는 초행길의 높낮이를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다. 대개 평지에 위치한 한국의 야구장들과는 달리 다저스타디움에 가기 위해서는 따가운 뙤약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지독한 언덕길을 올라야만 했다. 그 후 수백 대의 차들이 세워진 주차장을 가로질러서 겨우 매표소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스마트폰 화면에 띄운 경기장 좌석 배치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포수 뒤편 가장 꼭대기 자리인 'Top Deck' 입장권 구매에 성공했다. 다만 관전만을 생각했기에 꼭대기층까지 계단으로 캐리어를 들고 나르는 일은 예상치 못한 덤이었다. 그렇게 힘겹게 도착한 경기장 문턱에서 소지품 검사라는 그 사달이 난 것이다.


  그 위기에서 나를 구해준 이 마음씨 착한 직원은 자신을 '대니'라고 소개했다. 다른 직원들과 잠시 상의를 한 후 나를 통과시켜준 것으로도 모자라 내 캐리어를 직접 끌어주며 다저스타디움 곳곳을 안내해주었다. 소위 한국말 잘한다는 외국인들도 어느 정도 본토의 억양이 묻어나는 편인데 그는 정말 한국인의 그것과 똑같았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아내가 한국사람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를 끌고 도착한 어떤 유니폼 숍 주인에게 내 캐리어를 맡겼고 곱슬머리의 주인아주머니는 호탕하게 웃으며 날 기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내 옷에는 'SIXTY1'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득 같은 건 하나도 없는데도 선뜻 나서서 큰 도움을 준 두 사람에게 진심으로 미안함과 감사함을 표했다. 이후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이 친절함 가득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시련을 극복하면 더 좋은 상황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캐리어가 잠시 내 품을 떠난 지금 이 세상 자유로움은 모두 내 것이었다. 메이저리그 구장은 그 규모나 형태부터 한국과는 차원이 달랐는데 단순한 경기장이 아닌 구단의 역사를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라고 보는 게 더 맞아 보였다. 우선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따사로운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내리쬐는 초록빛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Dodgerdog'라는 이름의 핫도그와 맥주를 음미했다. 가게 옆에 작은 셀프 바가 있어서 잘게 썬 양파와 각종 소스를 핫도그에 마음껏 얹어 먹을 수 있었다. 배를 채운 다음에는 레전드 선수들로 가득한 전시관을 구경하고 기념품 숍에 가서 구단 로고가 박힌 미니 야구 배트도 구매했다. 그 사이 빈 좌석은 관중들의 기대감으로 하나둘 자리를 채웠고 운동장은 어느새 몸을 푸는 선수들의 투지로 가득했다.


  '플레이 볼(Play Ball).'


  분명히 꿈의 직관을 성공적으로 해낸 기쁨을 누리며 경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5회를 넘어갈 즈음부터 눈앞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이었는데 몸이 이상하리만치 개운했다. 순간 걱정스러운 예감이 들어 전광판을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8회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바라던 메이저리그 첫 직관 경기의 중반부가 통째로 날아간 것이었다. 이날 경기 시작이 LA 현지 시간으로 낮 1시경이었는데 한국 시간으로는 아침 5시였다. 지독한 고소공포증 때문에 비행기에서 거의 한숨도 못 자고 밤을 꼴딱 새웠으니 철인이라도 이런 수면부족을 이겨낼 재간은 없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도 비몽사몽인 나를 완전히 깨운 건 LA 주민들의 승리를 향한 환호성이었다. 모두가 하나 된 듯 거대한 파도를 만들었고 나도 같이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하며 남은 졸음을 내몰았다. 메이저리그는 우리나라처럼 응원문화가 보편화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직접 보니 사실상 응원가만 없지 흥분해서 소리치고 단체로 야유를 보내는 등 할 건 다 했다. 사람들의 염원이 전해진 듯 이날 LA 다저스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Padres)를 6대 4로 이겼다. 경기를 다 보고 돌아서는 내 발걸음은 가벼우면서도 무거웠다. 경기를 온전히 즐기지 못한 아쉬움이 큰 탓이었다. 그래도 한정된 기회 속에서 무사히 직관을 마쳤기에 더한 욕심은 거두기로 했다.


  이제는 학회가 열리는 장소이자 내가 묵을 숙소를 제공해 줄 UCLA(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로 향할 차례였다. 여기까지 왔던 길만큼 가는 길도 만만치 않겠지만, 이미 처음이라는 관문을 넘은 내게는 익숙함이라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언젠가는 메이저리그 30개 전 구장 직관을 달성하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으면서 다저스타디움과는 오랜 이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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