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 Angeles (17.08.13 ~ 17.08.19)
국가와 국가를 오가는 국제선 비행기는 지상으로부터 10km를 넘어선 성층권 높이에서 날아다닌다고 한다. 그 까마득하게 높은 상공에서 마주치는 이상기류는 이 거대한 기체를 수시로 흔들어 댔고 그 덕에 잠시도 편히 맘을 놓을 수 없었다. 나같이 중증 고소공포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장장 11시간에 이르는 비행이란 견디기 힘든 고역 그 자체였다. 혹여 추락하지는 않을까 하는 극도의 공포 속에서 편한 잠을 청하기란 불가능했기에 그 시간들을 그저 뜻 모를 영어자막 가득한 영화로 대체했다. 희미해진 의식 탓에 기내식을 몇 번 먹었는지도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니 꽤나 오랜 시간을 이 상태로 버틴 듯했다. 지금도 태평양을 건너가는 중이려나? 우습지만 이런 와중에도 바다 위가 딱딱한 땅보다는 살 확률이 높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기대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를 태운 비행기가 땅으로 떨어진 건 단 한 번, 무사히 활주로에 착륙할 때뿐이었다. 일단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재빨리 유심을 갈아 끼우고 데이터 신호가 정상적으로 잡히는지를 확인했다. 당시 미국 전역에 통신장애가 심해 몇몇 현지 통신사들의 유심이 먹통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별문제 없이 인터넷이 켜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 홀로 외딴섬에서 생존할 확률이 높아진 셈이다. 이제 의지할 곳도 생겼겠다 곧바로 가장 큰 난관인 입국 심사장의 문을 두드렸다. 그토록 피해 가고 싶었던 순간이 다가왔다. 영문사이트는 번역기라도 있지, 내가 현지인과 회화를 하게 될 줄이야. 쪽잠으로나마 연명해둔 정신을 바짝 붙들고 미리 세워 둔 전략을 상기했다. 무조건 '짧게'. 그리고 무조건 '간단하게'.
첫 번째 질문은 어디서 왔냐는 물음이었다. 내 대답은 "South Korea."
두 번째 질문은 며칠을 머무르냐는 물음이었다. 내 대답은 "Seven days."
세 번째 질문은 무엇을 하러 왔냐는 물음이었다. 내 대답은 "Sightseeing."
(학회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도 않았고 부연설명을 할 자신도 없을 뿐더러 거짓말을 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애초부터 내가 LA에 온 목적은 학회 참여와 관광, 둘 다였으니까.)
이렇게 단 세 마디에 입국장의 문이 활짝 열렸고 동시에 환희와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한껏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입국 심사를 통과하다니! 지금 이 자신감이라면 그 어떤 상황이 와도 단박에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고는 그 자리에 덜컥 멈춰 섰다. 사실 출국 직전까지도 졸업 논문 준비로 정신이 없어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 당연히 지금의 나는 숙소는커녕 이 공항을 빠져나가는 방법조차 몰랐다. 미국 초짜인 주제에 완전한 즉흥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현재 시간은 오전 7시를 갓 넘겼지만 시차 적응이 안된 내 몸은 밤 12시를 지나 새벽에 접어들고 있었다. 긴장이 풀어진 몸이 서서히 피로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이런 온전하지 못한 정신을 붙잡고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LA 국제공항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Shuttle'이라는 단어를 찾아서 'ㅁ'자로 된 독특한 구조를 따라 한 바퀴를 돌아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며 도움을 청했겠지만 다시 영어로 대화하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런 나에겐 'LA 공항에서 시내로'의 검색 결과가 알려 준 대로 공항 셔틀을 찾는 게 최선이었다. 그 무료 셔틀을 타고 공항을 빠져나가 메트로(Metro)를 타면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메트로라고 하길래 서울의 지하철을 떠올렸지만 LA에서는 경전철과 광역버스를 아우르는 8개 노선의 복합 교통망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그 노선들을 색깔로 구분했는데 그중 하나가 그린라인인 것이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었지만 이미 국내 곳곳을 다니며 여행에는 잔뼈가 굵은 몸이었다. 영어로 나오는 버스 안내방송을 못 알아들어도 구글 지도를 켜고 실시간으로 내릴 위치를 확인한다. 하차벨이 보이지 않았지만 용도를 전혀 알 수 없는 노란 선이 커튼 줄처럼 빙 둘러져 있기에 눈치껏 잡아당겼다. 역에 도착해서는 메트로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카드, TAP(Transit Access Pass) 7일권을 구매했다. 그렇게 그린라인의 경전철을 타고 달리다가 실버라인(Silver Line)의 고속버스로 환승해서 LA 시내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이때 곧바로 숙소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재미는 조금 덜했겠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민폐는 끼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캐리어를 끌고 오지 말았어야 할 곳에 무턱대고 찾아온 탓이었다. 여긴 다저스타디움(Dodger Stadium)이었고 소지품 검사를 하는 경기장 직원들은 난처함을 표했다. 캐리어를 따로 보관할 곳은 없었고 그렇다고 내 입장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큰 체구의 한 남자 직원이 성큼성큼 다가와 나에게 몇 마디를 건넸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고 나섰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영어가 안 되는 몸이다. 그 순간 그의 입에서 내 귀를 의심할 만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어눌함 하나 없는 정확한 발음으로 그가 내게 물은 것이었다.
"한국말, 할 줄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