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과 마흔 사이, 오구리 히로시
서른 살을 앞두고 있던 해, 책장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큰딸이 첫돌을 맞이할 때쯤이었는데, 그 당시 나는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도 특별히 흔들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내 삶이 만족하다고 살고 있었다. 나의 서른의 단추는 잘 끼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나에게 와닿았던 문장은 '1만 시간의 법칙을 따라라' 였다.
내가 하고 있던 어린이집 원장을 천직이라 생각하고 잘 운영하면 될 거라고 믿었다. 일상을 지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법. 꾸준히 하던 일을 열심히 하면 자연스레 볕이 드는 것처럼 내가 만족할 만한 보상도 따라올 거라 믿었다. 어떤 해는 선생님들 관리에 유독 힘든 해가 있었고, 어떤 해는 체력 좋고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쫓아다니느라 힘든 적도 있었다. 어떤 해는 학부모님들 관리하는데 내 하루의 에너지를 다 빼앗긴 적도 있었다. 그래도 나를 둘러싼 어린이집이란 공간만 잘 챙겨가면 된다고 믿었다. 그게 내게 주어진 인생이며 변화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서른 중반이 되어 둘째도 어느 정도 키워놓은 순간 이 책을 또 읽었다. 그때도 나의 삶은 비교적 잘 굴러간다고 생각했지만, 더 뭔가 나아지고 싶었다. 꿈이 있었던 20대를 돌이켜보면서, 그때 이루지 못한 목표를 이루고 싶었다.
이 때 눈에 띈 문장이 인생에서 가장 큰 밑천은 사람이라는 말이었는데, 정작 내 인생에서는 친했던 친구들마저 각자의 삶을 사느라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가도, 일이나 육아 때문에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왠지 그 당시엔 돈이라도 더 벌면 두루두루 챙길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생길거라고 생각했다. 해볼 만한 투잡을 해보겠다고 산모 교실에서 강의도 해보고, 관련된 일들을 제안도 받으며 여러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선 부딪혀보고 무조건 경험해 보자는 내 성격 탓에 뉴스에서 나올법한 일들도 겪어보게 되었다. 이쯤 알게 된 사람들을 통해 느낀 건 세상은 '사람을 돈으로 보고, 돈 앞에서 사람 하나가 이렇게 저렇게도 무너질 수 있구나.' 라는 안타까움이었다. 그 후, 인간관계가 허리케인처럼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며, 단순한 삶을 꿈꾸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하고 본업에 집중하며 살았다. 그리고 이 책의 7장에서 '때로는 도망치는 것도 전략이다.'라는 글을 나의 '조커' 같은 카드라고 생각하며 마음에 품고 살았다. 언젠가 그 카드를 내밀 때가 있을 거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서른 후반이 되며, 앞서 말한 '도망'이란 '조커 카드'를 사용하게 되었다. 맞다, 나는 본업에서 도망치게 되었다. 내가 개입 못할 거시적인 시장 자체의 흐름 때문이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 흐름에서 발을 빼야지만 내가 살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확신에 차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조커 카드를 빼든 순간이 내 삶의 분기점을 찍었던 순간이었다. 그 후 여러 갈래 길을 내면서 1년 3개월이 지나 다시 이 책을 펼치고 싶었다. 이번에 읽었을 때는 목차 한 문장 한 문장, 글 한 편 한 편이 나의 마음을 자꾸 노크하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노크지만 자꾸 울림의 진동으로 전신이 마구 요동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고 할까.
"자신의 믿음에 동요하지 않는다면,
기회와 행운은 언제나
우리를 따를 준비를 하고 있다."
ㅡ서른과 마흔 사이
이제 몇 년 후에도 이 글을 보며 과거에 이 책을 접한 시기들의 나를 돌이켜보고, 또다시 이 책을 읽으며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찾게 되겠지.
요즘 '마흔'을 콕 집어, 책 제목으로 나온 책들이 자주 보인다. 내 바로 옆에 붙어있는 우리집 아저씨도 자꾸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책을 이야기하면서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곤 한다. 그 미래가 우리의 노후인데, 노후가 솔직히 언제부터라고 정의하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흔에 죽을 수도 있다면, 내 인생을 두고 보았을 때 내일모레부터 당장 노후처럼 지내야 하는 시기일 수도 있지 않은가! 후회하지 않으려면 오늘을 알차게 최선을 다해 지내는 것 뿐이다.
매일 듣는 잔소리가
한 귀에서 한 귀로 흘러갈 때도 있지만
유난히 귀에 꽂힐 때도 있다.
요즘의 내가 그렇다.
세상의 모든 자극이
나에게는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어떤 신호들 같다고 느낀다.
내가 보고 듣는 것들이
쉽게 빠져나가지 않도록
자꾸 내 옆에 붙잡아두고 싶다.
생각해 보니, 이것 또한 욕심인가?
@ROZ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