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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호 Jun 24. 2021

누군가 날 감시한다면

한 달쯤 전, 같은 공간에서 일하던 막내 교수님이 출산 휴가를 떠나셔서, (막내 교수님이라 안타깝게도 전공의와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신다) 3개월 동안 넓은 공간을 혼자 쓰게 되었다. 교수님과 딱히 불편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교수님이 떠난 뒤 왠지 모를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그 홀가분함 때문인지, 교수님이 떠나고 맞는 첫 주에는 근무 중에 딴짓을 참 많이 했다. 다행히 일주일 만에 정신을 차렸고, 지금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속으로 소리치며 이전과 똑같이 일하려고 노력 중이다.


최근 간단한 수술을 받을 일이 있었다. 내 생각에는 아주 간단해서 부분 마취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병원에서는 수면 마취로 해야 한다고 했다. 병원의 말이 당연히 맞겠지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이놈들, 나 재워놓고 다른 허접한 의사 들여보내는 거 아니야? 아니, 간단한 수술인데 뭐 그렇게까지 할까? 아니지, 간단한 수술이니까 더 그럴 수 있지. (너무 길어서 이하 생략)' 머릿속에서 두 개의 자아가 한참 싸운 끝에 나온 결론은 의사가 의사를 안 믿으면 누가 의사를 믿어주겠냐는 것이었다. 얌전히 수면 마취로 수술을 받았고, 수술 경과는 좋았다.


수술실 CCTV 설치가 요 며칠 화제였다. 수술실 내부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하여 대리 수술, 무자격자 수술, 수술실 내 성범죄를 막아보겠다는 법이 만들어질락 말락 했기 때문이다. 2015년부터 나온 이야기라던데, 여전히 결론이 안 나고 있다. 국민의 80%나 찬성하는 법이라는데, 도대체 왜 안되고 있는 걸까? 의사들이 반대해서라는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의사 말에 휘둘릴 사람들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결국 돈 문제다. CCTV 설치 계획, 녹화 영상의 처리와 보관 방법들이 자세히 논의되지 않아서 통과가 안되었다는데, 사실은 저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돈을 누가 낼지 정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법의 통과와는 별개로, 이 법에 대한 국민의 입장과 의사의 입장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앞에 적은 최근의 경험들과 엮어서, 머릿속 두 개의 자아가 열띤 토론을 펼쳤다. 


국민의 찬성 논리는 다음과 같다. '환자는 수술실 내부에서 무방비 상태가 되고, 의사의 불법 의료 행위나 범죄에 대항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수술실 내부에 CCTV를 설치하여 의사가 범죄를 저지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의사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지만, 최근의 사회 분위기를 고려하면 일리 있는 주장이다.


의사의 반대 논리는 다음과 같다. 좀 길지만,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1. 관리가 어려운 초민감 개인 정보가 탄생한다. 수술 장면이 녹화된다면, 그 영상은 매우 민감한 개인 정보가 될 수밖에 없다. 수술 중 환자는 알몸으로 있고, 몸의 일부가 절제된다. 다른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어려운 장면이고, 촬영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담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영상이 해킹 등으로 유출된다면, 일반 의무기록 유출보다 훨씬 큰 피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기존보다 더 큰 주의가 요구된다. 영상 기록은 일반 의무기록보다 훨씬 큰 용량을 가질 것이기에 보관 문제도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2.  환자와 의사 사이 불신이 생기고, 이는 결국 환자의 건강권 침해로 이어진다. 의사가 최선을 다한다 해도, 수술 후 경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수술 중 변수가 많고, 수술뿐만 아니라 수술 전후 관리도 경과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수술 경과가 좋지 않을 때, 환자와 보호자가 수술 당시 CCTV를 확인할 수 있다면 어떨까? 어떻게든 이상한 점을 찾아내어 의사에게 수술 경과의 책임을 물으려고 시도할 것이다. CCTV가 없을 때는 의사의 합리적인 설명에 납득하던 환자와 보호자가, CCTV가 생긴 후로는 의사를 믿지 않고 CCTV부터 보자고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CCTV 설치 목적이었던 '대리 수술, 무자격자 수술, 성범죄 예방'은 어디 가고, '의료사고 증거 확보'가 새로운 목적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되면 의사는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철저히 책잡힐 일 없는 방식으로만 수술을 하게 된다. 더 좋은 결과를 위한 다양한 시도는 사라지고, 수술 중 변수가 생겼을 때 환자의 건강보다는 본인의 안위를 위한 선택을 하게 된다. 환자들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더 건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


3. 사생활 침해, 강하게 말하면 인권 침해가 발생한다. 이는 환자뿐 아니라, 수술실에서 근무하는 모든 의료진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이다. CCTV는 법적으로 특정한 사람만 사용하는 비공개된 장소에 촬영되는 모든 사람의 동의 없이는 설치할 수 없게 되어 있고, 사생활 침해 위험이 높은 장소에도 설치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예외로 허용되는 곳이 교도소와 정신보건시설이다. 수술실은 특히나 사생활 침해 위험이 높은 비공개 장소인데, 이곳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하자는 것은 단순히 환자와 의료진의 사생활 침해를 넘어, 수술하는 의료진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인권 침해다.




이 법에 대한 내 입장은 반대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인권 침해는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술실 의사 몇 명이 죄를 지었다고 수술하는 의사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며 감시하는 것은 불공정한 처사다. 국가가 자행하는 직업 차별이고, 평범한 국민에 대한 인권 침해다. 얼마 전 바뀐 의협 회장이 '수술실 입구 CCTV 설치, 내부고발 강화, 면허취소·재교부 기준 강화'라는 대책으로 해결하고자 하고 있으니, 국민들이 그 대책이 잘 작동하는지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의사들도 국민들만큼 수술 중 범죄를 저지르는 의사를 혐오하고 있고, 환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물론 국민들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방에서 일하던 교수님이 떠나고 한창 딴짓을 할 때, 나는 감시의 필요성을 느꼈다. 실제로 교수님이 감시한 것은 아니지만, 감시당한다고 느낄 때 더 일을 열심히 했다. 감시의 긍정적인 측면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교수님이 떠나면서 홀가분함도 느꼈다. 감시에서 해방된 느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잠시 능률이 떨어졌지만, (어차피 할 일은 해야 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복구됐다. 또한 가끔씩 흥얼거리기도 하고, 자세도 편하게 하면서 이전보다 더 즐겁게 일을 하게 됐다. 만약 교수님의 존재로 인한 간접적 감시가 아닌, 누군가 CCTV를 통해 직접적으로 감시한다면 난 아마 우울증에 걸릴 것이다. 괜히 흠잡히는게 두려워 앉은 자세, 마우스 클릭, 키보드 오타, 심지어 숨소리까지 신경 쓰다가 능률이 떨어져 버릴 것이다. 감시는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크다.


결국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의사를 믿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만큼 아는 사람인데도, 수면 마취를 당할 때 수술하는 의사를 의심해버린 전적이 있다.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되어 다른 사람의 손에 내 몸을 맡긴다는 공포는 생각보다 컸던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의사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분위기에서, CCTV 같은 명확한 증거 없이 환자가 의사를 믿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방법은 의사들이 더 노력하는 것밖에 없다. 우리에게 자정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CCTV 설치 같은 환자-의사 모두 lose-lose 하는 방법이 아닌, win-win 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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