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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호 Sep 05. 2024

2018년의 응급실

예전에 국가고시 준비 중 발생한 손목 통증으로 새벽에 응급실에 다녀왔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게 2018년 2월이었으나 불과 2달 후인 2018년 4월에 응급실 인턴으로 일을 하게 됐다. 오랜만에 그때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응급실은 생각보다 훨씬 체계적인 곳이다. 환자가 오면 먼저 트리아제(triage, 중증도 분류)를 거치게 된다. 응급실 입구를 지나 들어가면 혈압과 체온 등을 측정하는 사람을 만나 본인이 응급실에 왔는지 이야기하게 되는데, 정보를 토대로 환자가 응급실에서 어떤 구역으로 가게 될지 결정된다.


경증 환자들은 '초진 구역'으로 간다. 이 구역의 특징은 침대가 없고 앉아서 기다려야 된다는 것. 보통 온 순서대로 응급실 의사가 진료를 본다. 인턴 당시 봄 나들이 시즌이었는데, 넘어지거나 부딪혀 다치고 어디 찢어진 소아, 접촉 사고 피해자 등이 많이 왔다. 내가 손목통증으로 응급실에 방문했을 때도 초진 구역으로 분류됐었다. 이 구역은 간단한 약 처방과 처치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 인턴이 할 일은 많지 않았다.


환자 상태가 초진 구역에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되면, 침대를 배정받고 응급실 더 안쪽으로 들어간다. 지금은 분류가 바뀌었을지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일반 응급 구역'과 '중증 응급 구역'이 있었다. 대부분은 트리아제에서 응급 구역으로 바로 들어오는데, 초진 구역에서 진료 후 의사 판단 하에 응급 구역으로 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응급실 인턴은 응급 구역에서 많은 업무를 했다. 주로 하는 일은 혈액 검사, 소변줄 삽입, 동의서 받기 등 간단한 처치였다. 응급 구역에 인턴 전용 책상이 있어서, 그 위에 간호사들이 새로 생긴 일들을 올려두면 알아서 처리하는 시스템이었다. 크게 머리를 쓰는 일은 없었으나,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다.


정말 죽을 수도 있는 환자가 오는 경우, '격리 구역'으로 배정된다. 응급실 안에 있는 간이 중환자실이라고 보면 된다. 벽이 유리로 된 넓은 병실 여러 개가 붙어 있는 구조인데, 다양한 응급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세팅이 되어 있다. 이곳은 항상 꽉 차 있지는 않았고, 비어 있는 경우도 많았지만 한 번 환자가 생기면 일 폭탄이 떨어졌다. 격리 구역에 환자가 생기면 인턴 한 명이 붙어서 다양한 역할을 해야 했고, 그만큼 다른 구역에서는 일이 지체됐기 때문이었다.


격리 구역에는 '죽을 수도 있는' 환자가 들어갔다면, 마지막 '소생실'에는 '죽은' 환자가 들어왔다. 보통 119에서 전화가 먼저 왔다. 심정지 환자를 데리고 몇 분 후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소생 구역으로 달려갔다. 한참 심폐소생술을 하고 자리로 돌아오면 일이 잔뜩 쌓여있었다.


응급실 인턴이 하는 일은 크게 재밌지 않았지만, 응급실 의사가 하는 일은 상당히 재밌어 보였다. 환자의 증상에 따라 수많은 병을 의심하고 각종 검사를 통해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목숨이 위험한 환자를 적절한 처치를 통해 어떻게든 살리려는 노력. 사실 다른 의사들도 가진 능력이고 의사 업무의 대부분이다. 그래도 응급실 의사가 더 매력적이었던 것은 빠른 판단력과 민첩한 행동력이 더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에피소드. 내가 일반 응급 구역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근처 침대에서 모니터 알림음이 계속 나왔다. 지나가면서 슬쩍 보니 7,8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숨을 잘 못 쉬고 있었다. 보호자는 알림음에 어쩔 줄 모르고 있었고, 담당 간호사와 전공의는 너무 바빠서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모니터를 보니 산소포화도가 80%대로 내려와 있었다. 심상치 않은 거 같아서 잘 모르지만 지나가던 응급의학과 교수를 붙잡고 말했다.


"교수님! 저 환자 새츄(산소 포화도, saturation의 병원 콩글리시) 80대인데요."

"(모니터 보자마자) OO(응급실 전공의)! 격리 구역 가야겠다. (나를 보며) 베드 끌고 격리 구역으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판단을 내린 교수는 금세 보호자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격리 구역으로 넘어와서 기관 삽관을 지시했다. 평소에는 실없는 농담만 하기로 유명한 교수였는데, 본업 모먼트를 보니 약간 멋있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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