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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펜똥 Jul 08. 2020

<엠 버터플라이>,
이분법적 사고의 위험성

M.butterfly는 갈리마드와 송의 모습을 통해 제국주의가 자신들의 정복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제국주의를 해체 시키고자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 갈리마드는 남성성이 결여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못생긴 외모로 인해, 서양 여자들과의 데이트 신청 역시 꺼리며, 매사에 자신감이 없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남성성이 결여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하기 위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여성을 정복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서양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도 서양 여자들을 정복하지 못한다. 서양 여자들과의 잠자리에서도 적극적인 그녀들의 모습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서양 여자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는 주도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동양여자에게 눈을 돌린다. 그런 그에게 동양여자는 자신이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이며,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그의 생각은 나비부인이라는 연극을 보고 난 후 그가 나비의 희생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장면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연약하고 순종적인 나비부인이 보 잘 것 없는 핑거튼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동양여자들은 순종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 역시 핑거튼처럼 이들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송을 나비부인에 대입시키고, 자기 자신을 핑거튼에 대입시킴으로써, 자기 자신만의 남성성을 회복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송이 그의 열등감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다.


 작품속에서 그는 송을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그녀의 편지를 무시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송이 자신을 더욱 원할 것이며, 순종적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는 송이 그에게 친구로서 그리웠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자존심 상해하기도 한다. 이런 그의 모습에서, 그는 송, 즉 동양여성을 순종적이고 자신에게 복종 해야 하는 존재로 보며,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하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친구’라는 말이 거슬렸던 이유도, 송은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과 동등해질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그의 생각을 송과의 관계를 통해 강화하게 된다. 극 중에서, 그는 송을 만난 이후로, 부영사로 승진하게 된다. 이에 그는 자신의 남성성이 드디어 회복이 되었으며, 자신의 남성성이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갈리마드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인 사고를 형성하고 강화해 나갔다. 여성은 약하고, 순종적인 존재이고, 그와 달리 남성은 강하고, 이성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자를 이끌어 나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여성을 열등 타자화 하면서, 그는 여성에 대한 정복을 당연하게 여기고, 여성의 정복함으로써, 자신이 정의 내린 남성성이 실현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인 생각은 동양과 서양 간의 관계로도 이어진다. 동양을 여성에 대입시켜, 동양을 연약하고 순종적인 존재로, 그리고 서양을 남성에 대입시켜, 강한 존재라고 인식하며, 동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한다. 즉, 동양을 열등 타자화 하면서, 우월한 서양이 열등한 동양을 이끌어 주어야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갈리마드의 제국주의적 가치관은 베트남 전쟁에 관한 그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베트남을 비롯한 동양 국가들은 서양의 우월한 힘을 동경하며, 중국 역시 서양의 지배하에 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말한다. 이에는 동양은 열등하고 순종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베트남 전쟁과 송을 통해 서양의 이분법적인 제국주의적 가치관을 해체 시킨다. 베트남 전쟁의 승리자는 미국이 아니라, 베트남이었고, 갈리마드가 동양여성이라고 믿었던 송 역시 남성이었다. 전쟁의 승리자와 젠더를 뒤바꿈으로써 서양의 제국주의적 가치관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양의 제국주의적 관점은 자신의 우월함을 강화하는 관점임과 동시에, 동양의 저항의지와 긍지에 대해 방심하게 하는 요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작가는 송과 베트남을 통해 서양의 우월함 역시 거짓이라고 말을 한다. 서양의 우월함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동양이 열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오로지 서양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뿐, 현실은 동양의 승리로 이끌었다. 동양이 역사속의 승자가 되고, 송이 남성임을 보여주며, 동양이 결코 열등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양의 열등함이 거짓이 됨으로써, 그와 동시에 서양의 우월함 역시 거짓이 되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의 결과 그리고 특히 송의 정체를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갈리마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그는 작품의 결말에서 여성의 복장을 한 채 자살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2가지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번째로, 갈리마드가 제국주의가 해체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과연 갈리마드가 송이 남자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오랜 함께 시간 살면서, 송이 자신의 성별을 완벽하게 숨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갈리마드가 송의 정체를 여성이라고 믿고 싶어했을 가능성이 크다. 송이 남자임을 인정하게 되면, 자기 자신의 사랑이 거짓이 될 뿐만 아니라, 동양 여성은 언제나 순종적이며, 이들을 지배하는 것은 서양 남자라는 제국주의적 관점이 파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송은 남자였으며, 이에 갈리마드는 송이 나비라고 믿어왔지만, 자신이 나비였음을, 그리고 그 나비를 속인 핑거튼이 송이였음을 깨닫게 된다. 송을 통해, 동양여성이 서양남자가 되어버리고, 서양남자가 동양의 나비가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긴 것이다. 서양 남자인 갈리마드는 자신으로 인해 서양의 남성성이 훼손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존재해선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살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지워버림으로써, 제국주의적 관점을 유지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두번째로, 동성애적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갈리마드가 여성의 옷차림을 한 채로 자결을 했다는 점에서 의문점이 생겼는데, 이를 동성애적 관점과 연관지어 보았다. 갈리마드가 송의 정체를 부인한 이유로는 송이 남자임을 인정하면, 자신의 사랑이 동성애가 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관점에서는 동성애는 용납될 수 없다. 갈리마드는 타인과의 권력투쟁에서 권력을 쟁취해야 자기 자신의 남성성이 발휘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 당시 동성애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였다. 더군다나, 이분법적인 사고 방식에서도 봤듯이 그 당시의 이데올로기는 여성과 남성간의 관계 즉 이성관의 관계로 구분되어졌지, 남성 간의 사랑(동성관의 관계)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당연히 동성애는 배제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동성애는 사회의 배척상대이자,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남성성을 훼손시키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더욱 송이 남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법정에서 송의 정체가 완전히 밝혀지게 되었고, 자신의 동성애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여성의 복장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기꺼이 여성이 됨으로써, 배척되었던 자신의 동성애를 이성간의 사랑으로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듯, 현대의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숨어있다. 여성과 남성, 동양과 서양, 백인과 흑인, 이성애와 동성애 등의 관념에서 매우 잘 드러난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는 열등한 것과 우월한 것으로 규정짓게 하고, 이는 다양한 폭력과 갈등을 유발한다. 이 책의 저자도 송과 갈리마드의 관계를 통해,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의 폭력성과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다. 나 역시,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양 해야 하며,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 대신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측면에서의 전체론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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