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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텔리안 토드 Oct 11. 2021

호텔에 버건디 양말을 신고
출근하지 말라고요?

나의 양말 색상을 주제로 열린 4자 미팅

2012년 서울. 글로벌 호텔 체인 중 하나인 모 호텔에서 근무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영업부서의 세일즈 매니저로서 매일 수트를 입어야 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수트는 고객들에게 나를 표현하기에 좋은 수단이었다. 검은색 수트만이 아닌, 다양한 색감의 수트와 구두, 양말의 조합을 고민하고 실행했다.




하루는 버건디 구두에 버건디 양말을 매치해서 출근했다. 여느 날과 동일하게 외근을 마치고 호텔로 복귀했는데, 내 착장을 본 부장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당시 영업마케팅 부서에는 외국인 디렉터가 총괄 책임으로 있었고, 그분 아래로 영업을 총괄하는 여성 디렉터(한국 직급으로 부장이자 당시 직속 상사)가 있었다. 부장님은 평소에도 꽤 보수적인 분이셨다. 나쁜 의미는 아니고, 조직 문화를 중시하는. )



"토드 지배인, 양말 색깔이 너무 튀는 거 아닌가? 검정 양말도 많을 텐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호텔에서는 영어 이름 + 직급을 부르는 게 흔했다.


"네? 버건디 구두에 검정 양말이요? 좀 이상할 거 같은데요. 그리고 전 검은색 양말이 없습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검은색 양말을 신기 싫었다. 위에 언급했듯이 수트와 구두, 양말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었으며, 검은색 수트와 양말, 구두로 이어지는 스타일만이 호텔리어로서 프로페셔널을 나타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일이 있고 며칠 뒤, 4인 미팅이 열렸다.

"토드의 양말 색깔은 적합한가?"라는 주제로. 

이게 무슨 소리냐, 지어낸 이야기 아니냐 싶겠지만, 그 믿기 어려운 상황이 일어났다.



미팅에는 인사총괄, 영업마케팅 총괄(외국인), 영업부 부장(직속 상사), 그리고 나(토드). 이렇게 4명이 참석했다.

인사총괄분은 사내 규정이 담긴 책자를 보시며 양말 색상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없다며, 호텔 분위기와 명성에 맞게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이 요구된다는 게 기본 방침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영업부 부장님은 그래도 빨강 양말(빨강 아니고 버건디였다...)은 지나치다고, 어두운 색이 깔끔하지 않냐고 하셨다.

난 조용히 외국인인 영업마케팅 총괄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외국인 총괄분은 사내 규정에 양말 색상에 대한 지침이 없다면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게 좋겠다며, 본인이 보기에는 문제가 없다고 발언했다.


결론은 '토드는 버건디 양말을 신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영업 부장님은 그 이후로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이런 미팅을 해야 하나? 진짜 버건디 구두에 버건디 양말을 신는 게 이상한 건가?'


버건디 양말을 신어도 된다는 안도감보다는 '양말 색상'이 미팅 안건이 된다는 회의감이 들었다. 주변 지인들과 다른 호텔리어분들에게 얘기를 해봐도 대부분이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그중 한 호텔리어가 "그럼 검은색 구두를 신는 건 어떨까? 거기에 검은색 양말을 매치하면 되니까"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를 표현하기 위한 검정 구두와 검정 양말?


뭐, 아무렴 좋다. 문제가 정말 구두와 양말의 색상이라면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느꼈다시피 문제가 화려한 양말 색상에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문제는 직원이 영업을 얼마나 잘, 성실히 하고 있느냐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양말 색상이라는 사소한 것에 잘잘못을 따지고 있다는 것에 있다.




지금은 한국 호텔에서 버건디 양말을 신어도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약 8-9년 전 한국 호텔의 조직문화는 꽤나 보수적이었다. 조직 내 서열이 명확하고, 선후배 관계가 엄격했다. 영업부서 외에 다른 부서는 더 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 호텔 조직 문화가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시 내가 호텔이라는 산업에서 근무하며 느꼈던 전반적인 분위기가 보수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아마 그 당시에는 한국 대부분 기업들의 문화가 엄격한 서열과, 빡센 출퇴근(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튀지 않는 복장 등 매우 보수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튼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오래 지나지 않아 한국을 떠났다. 이제는 호텔에서 버건디 구두에 버건디 양말을 마음 편히 신고 있다. 검은색 양말은 장례식을 제외하고는 신지 않는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버건디 양말 사건 이후, 나도 누군가에게 나의 확고한 신념이나 가치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나 자주 생각해보곤 한다. 내일은 버건디 양말을 신고 출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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