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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르 Mar 13. 2024

[별글] 230_ 낭비 없는 낭만은 없어

  초등학교 저학년 때 혼자 노느라 여념이 없다가 고학년이 되어서 드디어 같은 반 친구들과 사귀는 맛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내가 꽂혔던 활동은 교환일기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하드커버로 된 '곰돌이 푸' 캐릭터 노트에 네 명의 친구가 교환일기를 썼던 걸 시작으로 나의 교환일기의 역사는 중학교 3학년까지도 이어졌다. 딱히 비밀은 아닌 비밀을 나눈 나의 첫 교환일기 친구들, D와 Y 그리고 M과 나누던 이야기가 아직도 본가 책꽂이에 잠들어 있다. 함께 일기를 쓸 친구를 선별하는 일은 굉장히 세심한 과정이었다. 우선 글쓰기를 좋아해야 했고 교환일기라는 행위 자체를 유치하게 여기지 않을 만한 친구여야 했다. 나의 첫 교환일기 멤버는 원래 다섯이어야 했다. H라는 친구를 섭외하려다 실패한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다.


  당시에 우리 학교에서는 선진적이게도 컴퓨터 수업(이라봐야 한컴 타자연습이 대부분이었지만)을 많이 진행했고 '에듀모아'라는 사이트를 중요하게 활용했다. H에게 교환일기를 같이 쓰자고 권하고 싶은데, 말을 걸 기회를 잡지 못한 나는 에듀모아 쪽지로 그애에게 전했다. 


- H야, 나랑 D, Y, M이랑 같이 교환일기 쓸래?

- 싫어.


H의 답장은 간결해서 충격이었다. 아마 얼굴을 보고 권했더라면 그렇게까지 단칼에 거절당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에듀모아 쪽지로 물어본 것을 조금 후회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대방의 행동의 이유가 늘 궁금한 나는 왜냐고 물었다. 답장이 가관이었다.


- 시간낭비펜살돈낭비노트낭비에너지낭비잉크낭비종이낭비 ...(중략)


그리 작지 않았던 에듀모아 쪽지 창이 가득할만큼 긴 메시지에, '낭비'라는 단어가 서른 번은 반복되어서 나는 약간 압도당했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없어서 답장은 하지 못했다(사실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교환일기가 낭비하는 것들을 서른 가지나 생각해낸 그녀가 존경스럽다). 그때의 나는 추억을 남기는 일이 나중의 나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도 모를 정도로 어렸으므로, 추억 운운하는 변명조차도 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친구에게 뒤늦은 답장을 하자면, 나는 낭비를 예찬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효율성이라는 유령에 홀려 의미 있는 낭비의 가치를 잊고 지낸다.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낭비는 다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심지어 쓰지도 않을 물건에 돈을 탕진하거나, 종일 누워서 쇼츠를 보는 일조차도 유의미한 낭비일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지도를 잘못 봐서 여행지에서 세 시간을 헤매거나, 좋아하는 가수를 보겠다고 잔고의 절반을 투척하는 일이 유의미한 낭비로 느껴진다. 모든 낭비가 낭만은 아니겠지만 낭비 없이 성립하는 낭만도 많지 않다. 


  나는 내 인생이 효율적이지 않기를 바란다. 헤매는 여정에서도 의미를 찾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가끔은 H의 안부가 궁금하다. 아마 교환일기를 쓰자는 제안을 거절한 일은 잊고 있겠지. 너의 거절이 나에게 얼마나 강렬했는지 말해주고 싶다. 지금도 여전히 교환일기가 그렇게 낭비라고 생각하는지 가끔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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