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묘연
앞마당에 방문한 낯선 방랑객에 자꾸 마음이 가서 캣사료까지 샀는데, 사료를 먹을 주인공이 얼굴을 보이지 않아, 안타까운 날들이 벌써 사흘째.
뭔가가 나타났다.
그런데, 딴 놈이다.
아마도 청소년냥이가 영역다툼에서 지고, 원래 이 구역 주인이 나타났나보다. 정면샷을 찍을 수는 없었는데, 이 흰둥이는 참 못생겼다. 어지간하면, 고양이는 귀염귀염함에 있어서 프로라고 하는데, 하는 짓이 미워서 그런지 어디 이쁜 구석하나 찾기 힘든 보기 드문 고양이이다.
하지만 사료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내 개인적으로는 청소년냥이가 애잔하지만, 길 위에서 하루하루가 투쟁인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저 녀석도 마찬가지일텐데 말이다. 못생겼다고, 미운짓한다고, 사람의 잣대를 저 아이에게 들이대는 것은 우스운 일 아니겠는가.
그렇게 엉뚱한 녀석이 수혜를 입는 날들이 또 무심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일주일쯤 뒤,
드디어!
내 맘을 아리게 했던 청소년냥이가 나타났다.
이 사진은 청소년냥이가 아니다. 중성화 표식도 있고, 같은 고등어태비라 처음에는 그 아이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청소년냥이보다는 좀더 자란, 갓 성묘가 된 것으로 짐작되는 아이였다.
청소년냥이에게 사료를 주려는데, 새롭게 등장한 뉴페이스 고등어태비가 청소년냥이에게 하악질을 해댔다. 청소년냥이가 아직 덩치도 작고 어린지라 당연히 도망칠 수 밖에. 다 같이 먹을 양이 충분하건만, 가차없는 야생의 법칙은 길 위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런데, 또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 동네 왕초 비스무리한 것 같은, 못생긴 흰둥이 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밥먹는 흰 궁둥이가 보일 것이다.
서열 1위가 흰둥이,
방충망 너머로 나를 경계하며 바라보고 있는 고등어가 다음 순번인 듯 했다.
청소년이는 성묘들 등쌀에 못이겨 달아나 내 시선이 보이는 곳에는 없다.
점점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데, 다같이 사이좋게 지내면 좋으련만, 이 역시 인간의 잣대. 어디 쟤들이 사람맘 같겠는가.
재미있는 일은 또 있었다. 담배 피러 나갔다 들어오는 남편의 옷에 지푸라기와 풀물이 들어 있어 심문했더니 들려오는 대답이 또 걸작이다. 고양이들의 역학 관계에 대해 뭐라고 종알거린 것이 기억이 났는지, 밖에 나갔다가 보이길래 관목을 헤집고 들어가서 흰둥이를 위협해서 쫒아냈다는 것이다. 아니, 뭔 짓을 한 것이여, 이 고냥이 습성도 모르는 바보 남편!
이런 인간들의 시선과는 무관하게, 세마리의 고양이들은 곧 자기들만의 규칙을 찾았고, 자신들의 질서대로 도시 생태계 속에서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비온 뒤 종이 박스가 젖어서 새 박스로 바꿔줬는데, 이건 또 마음에 안드는지 아무도 사용을 안한다. 진짜 까다롭기는 지들이 상전이다.
하루하루 날씨가 추워지고 있다.
Winter is coming~
날이 추워져서 그런지 잘 마주치지를 못해 생존 여부도 불확실하긴 하다. 다만 사료 줄어드는 속도가 비슷한 걸 보면 셋 다 먹고 있다고 짐작은 가는데 말이다. 겨울용 커다란 사과 박스로 집을 만들고, 못쓰는 겨울 점퍼를 잘라서 방한용으로 깔아 베란다와 지면 사이에 넣어두었다. 상자 입구에 털들이 붙어있는 것으로 봐서 이 박스는 사용은 하는 것으로 짐작되어 안심이다.
그리고, 그해 겨울이 지났다.
나도 바빠져 베란다에서 고양이 관찰할 시간이 없어졌다. 아이들이 얼굴 보이는 날이 줄어들었고, 이제는 사료도 더이상 줄어들지 않는다.
15kg짜리 사료 한 포대를 채 다 먹지도 못하고 짧은 묘연만 남긴 채 녀석들은 사라졌다.
그렇게 3년이 흐르고, 그 간 에어컨 실외기 위에 많은 뉴페이스들이 왔다 갔지만, 그 이후로는 마음을 뺏기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또 고등어태비 한 마리가 눈 앞에 자꾸 밟힌다. 그런데, 이 놈은 도통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베란다에 인기척이 들리면, 집과 앞마당이 이어지는 계단 앞에 앉아 냥냥~ 거리며 존재를 과시하는데, 막상 사료를 주면 냄새만 맡고 쿨하게 돌아서서 가버린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또 사료는 줄어들고 있다. 나랑 밀당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하자는 플레이니.
이 녀석 역시 중성화는 거친 놈이다. 중성화 과정에서 사람의 손을 타면서, 날 더러 자기를 기르라고 냥냥~ 거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보기엔 날 더러 하악질을 해대고.... 밥이 목적이라기엔 내 눈 앞에서는 사료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늘 쿨한 태도를 취한다.
이 녀석 때문에, 3년전 샀던 사료를 다 쓰고, 다시 새로운 사료를 한 포대 더 장만했다. 밀당을 하든말든 상관없으니, 이 사료 포대 다 먹을 때까지라도 건강하게 눈앞에 자주 나타나렴.
이 녀석 때문에, 3년전 고양이들 생각이 나서 이렇게 글로나마 스쳐지나갔던 그 아이들을 기록해본다.
아직 이 녀석은 사진은 찍지 않고 있다. 날 보면 하악질 해대는 괘씸한 녀석, 밥달라고 해놓고 쿨 하게 엉덩이 보이며 사라지는 녀석, 그래놓고는 몰래몰래 사료는 챙겨먹는 녀석, 도대체 정가는 구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