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이 원래 출산예정일이었다. 그런데, 예정일은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39주가 되도록 출산 징후가 하나도 없다. 임신 16주가 지나면 현격하게 감소되던 태아사망률이 40주가 넘어가면 다시 증가하기 때문에, 하루하루 걱정도 덩달아 커져갔다.
그리고 결국 8월 12일, 39주 4일차 되던 날, 마지막 정기검진에서 내진을 통해 자궁 경부쪽을 살짝 긁어놓고, 8월 18일 화요일로 유도분만 날짜를 잡았다. 긴 연휴로 인한 택일이었다. 마침, 그 날은 남편의 음력 생일이라 잘하면 아기와 아버지 생일이 같아질 수도 있는 상황.
8월 12일 수요일. 39주 4일.
정기검진 후, 남편은 출산 전 마지막 유흥이라며 직장 동료들과 스크린 골프를 치러 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설거지 후 한숨 돌리기 위해 누웠다. 그런데, 갑자기 속옷이 축축해지는 기분이 들지 뭔가.
아침 내진 후, 아랫배가 자주 아프고, 수축도 잦아지는 기분이었기에, 담당교수님의 처방(?)이 효력을 발휘한다 싶었다. 이제서야 냉이 나오기 시작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섰다. 그런데 말이다, 뜨거운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리는데, 적지 않은 양이다.
양수가 터졌구나!
출산 징후 모두 건너뛰고 바로 양수 파수로 시작되어버린 나의 출산.
놀고 있던 남편에게 전화를 한 후, 대충 꾸려놓았던 출산 가방에 빠진 물건들을 마저 집어넣고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드라이로 말렸다. 어차피 양수는 터진 거고, 서두른다고 뭐가 달라지랴는 생각. 출산 후 통증으로 제대로 씻지 못하는 불편함을 호소하는 다른 분들의 출산 경험담 때문에 씻고 싶어졌다고나 할까. 내가 곧 출산한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때가 저녁 8시 30분.
낮에 그나마 조금 잦아졌던 진통과 수축은 양수가 터진 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진통 측정 어플은 나에게는 무용한 물건이었다. 진통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활용하겠는가.
그래도 어쩌겠는가. 양수가 터졌으니, 24시간 안에 출산을 해야 태아가 무사할 것이고, 어떻게 하든 이 밤에 아이를 낳겠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양수는 터졌고, 이미 저녁 시간, 어차피 응급실로 가야하는 거, 서두른다고 달라질 일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 생각으로 나는 여유롭다 못해 늑장을 부렸다.
놀다가 호출당한 남편도 여유만만인 내 분위기에 동화되어서 덩달아 샤워를 하며, 부부가 쌍으로 늑장을 피운 후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이 때가 9시 30분.
내가 출산할 예정이었던 대학병원은 코로나 선별진료소이면서 지역거점 병원인데다가, 밤 늦은 시간이었기에 머리에 피를 묻힌 환자, 소아응급실을 찾아온 아픈 아기와 어머니 등 여러 응급 환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양수가 터져서 왔다니까, 안내 직원이 휠체어를 내밀었다. 양수로 생리대가 축축히 젖는 중이라는 걸 제외하고는 지극히 멀쩡했기에,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치고 사양했다.
응급실 원무과를 통해 접수 후, 혈압을 측정한 뒤 기다리니, 응급실 담당의들이 와서 여러가지를 물었다. 그 중에는, 양수 파수 후 왜 이렇게 늦게 왔는지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서둘러야 했던 것인가.
분만실은 어린이병동 4층에 있었는데, 안전상의 이유인지 몰라도, 찾아가는 길이 아주 복잡했다. 4층으로 바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존재하지 않고, 3층에서 내려 다시 다른 엘리베이터를 갈아타야만 하는 구조. 그랬기에 4층 분만실 당직의에게까지 직접 안내를 해주는 친절한 서비스까지, 감사했다.
이제 밤 10시.
여러가지 질문과 내진과, 초음파와 검사를 받느라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의 시간이 경과했다. 예상대로 양수 파수 상태였고, 지금 자궁 내에 남아 있는 양수는 거의 없는 상태. 대부분이 다 흘러나온 뒤라고 했다. 이제는 피도 약간 섞여서 나오고 있었다.
양수가 터진 뒤 24시간 이내에 출산하면 감염걱정 안해도 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제한시간이 18시간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마지노선은 13일 오후 2시. 보통 이 시간까지 출산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술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하라는 설명을 들었다.
자궁은 단 1미리도 열리지 않은데다가, 자궁 두께도 아주 두텁고, 자궁 자체도 전혀 내려오지 않은 상황. 5센티미터 이상 더 내려와야 하는 상태. 당직 의사쌤은 고개를 저으며, 오후 2시까지 출산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링거 줄 꽂다가 혈관이 터졌다. 잠시후 조금 더 숙달된 간호사가 와서 뒷처치 및 제모를 했다. 출산굴욕 3종세트니 어쩌니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제모였는데, 그냥 필요한 의료행위 절차 중 하나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본격 분만 과정이 시작될 때까지 이렇게 여러가지 분만 밑작업을 거쳤다.
밤 12시.
드디어 분만실 맞은 편의 진통실의 한 침대에 누워 일반 수액과 함께 분만촉진제를 투여받기 시작했다. 무통주사를 신청해놓긴 했는데, 대학병원 답게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응급 수술이 많은 야간인지라 생명에 지장이 없는 나에게까지 야간 당직 마취의가 올 짬이 없었다. 아침 9시, 다른 마취과 의사들이 정상 출근 하기 전까지 혼자 고통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정 힘들 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치는, 마약성 진통제 엉덩이 주사.
이런 상황인데, 옆에서 할 일은 없다며 남의 편은 집에 갔다 오니 마니 심술을 부리다가, 결국 옆의 보호자용 침상에 누워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다.
새벽 2시.
태아 심음 측적을 위한 측정기와, 자궁 수축 검사를 위한 측정기 2개를 배에 붙인 채, 슬슬 유도제 약기운으로 통증의 강도가 점점 거세짐을 느낀다. 이제 와 아무런 의미는 없지만, 진통측정 어플로 측정해보니 3분 간격의 진진통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전에 내가 진통이라고 느꼈던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둔해서 가진통과 진진통을 구분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촉진제 맞기 이전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진통이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었을 뿐. 진진통은 규칙적이면서 다리까지 저릿할 강도의 통증이라고 하던데, 정말로 그랬다. 다리까지 저릿저릿한 통증이 주기적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보통 배를 어루만져주면 통증이 좀 덜해지는데, 이미 두개의 측정기를 부착해둔 배에는 손이 올라갈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견딜만한 수준의 통증이었다. 집에서 병원으로 출발하라고 하는, 3분 통증이었으니까 말이다. 촉진제를 통해서야 간신히 다른 산모들의 출발점을 따라잡았다고나 할까.
진통이 심해지면서 아랫배도 점점 아파져 와서, 코골며 자는 남편을 깨워 화장실에 가서 변을 보고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자연관장"이라고 일컫는 현상이었다.
여전히 자궁은 단 1미리도 열리지 않은 상태지만, 그래도 자궁벽이 얇아지면서 연해지며 출산 준비가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의료진에게서 들었다.
새벽 3시 30분.
2차 체크를 위해 의료진이 방문했다. 코골고 자던 남편을 쫒아내고 내진을 다시 한번 더 했다. 순조롭게 진행이 잘 되고 있단다. 역시 자궁은 1밀리도 열리지 않았지만, 밤 12시에 5센치 넘게 남았던 자궁경부 길이가 이제 짧아지고 자궁이 내려오고 있다고. 통증은 이제 견디기 힘든 수준이었다. 통증 간의 간격은 일부러 측정하지 않았지만 1분 30초 남짓, 그 짧은, 통증이 없는 시간의 꿀맛같은 편안함을 느끼며, 잠깐씩 잠에 취하다 통증으로 인해 다시 깨기를 반복했다.
통증을 견디기 힘들다 싶어서 마약성 진통 주사를 요청했다.
이 시각, 진통제를 맞는 것을 본 뒤 남편은 집으로 귀가를 했다. 이 날 오전 아주 중요한 회의가 있어 반드시 출근을 해야하는 상황이라 시어머니와의 교대를 위해서였다.
새벽 4시.
진통제까지 맞았으니 조금이라도 통증이 진정되기를 바랬건만, 오히려 점점 더 아파져왔다. 흔히들 얘기하는, 출산 과정에서 산모들이 고통으로 인해 "허리를 튼다"고 말하는 상황이 이거구나, 글자로만 익혔던 출산의 매 과정과정을 아주 짧은 시간에 압축해서 생생하게 실전으로 체험을 하고 있다. 아침 9시가 되어야 무통 천국을 만날 수 있을텐데, 병실 창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은 아직도 암흑천지다. 혼자서 침대 양쪽의 낙상 방지 가드를 붙들고 몸부림 치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의미는 없지만(!) 남편을 소환하고, 마약성 진통제가 효과가 없는 사람도 있으니, 그 때는 더 해줄 수 있는 조치가 없다고 말한 간호사도 호출했다. 이 때 시간이 새벽 4시 30분.
아침 9시 의료진 출근 시간만을 기다리다보니, 매 순간 시간대가 생생하게 다 기억이 난다.
다시 내진.
그리고 난 후 갑자기 아주 분주해졌다. 세상에, 말이다... 새벽 3시까지 단 1밀리도 열리지 않았던 자궁문이 그 한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7센티 넘게 열렸다는 거다. 출산에 대해 하나도 모르지만, 이렇게 급속하게 열리는 것이 일반적인 일은 아니지 싶었다.
내가 알고 있는 출산 매커니즘은, 옥시토신으로 인해 자궁이 수축하지 않는 시간 동안 도파민이 나와서 통증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아픈 타이밍-안 아픈(?), 덜 아픈(?) 타이밍의 쿵짝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60분 동안 7센치가 열리려면 10분에 1센치 가량씩 자궁문이 벌어졌다는 얘기이니, 그런 호르몬 간의 리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결국 그 통증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나중에 남편의 증언에 따르면, 자기가 병실 앞에 다시 도착했을 때가 새벽 4시 45분, 그 시간에는 10센티로 풀로 다 열렸다고 들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설명해주면서, 당직 의사가 꿈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30분이면 출산할 수 있어요!
새벽 4시 30분 무렵부터 출산을 위한 본격적인 진통을 시작했다. 이 때쯤부터는 졸음과 통증으로 반쯤 제 정신이 아닌 상태. 관장을 했는데 새벽 2시에 이미 화장실에 가서 자연관장을 하고 난 후라서 괜히 헛힘만 실컷 쓰고 돌아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제, 본격적인 산통 시작. 두 다리를 벌려 낙상방지 가드에 하나씩 걸치고 통증이 있을 때 화장실에서 변보는 느낌으로 아래쪽을 보며 최대한 숨을 참고 힘을 주라는 설명을 들었다. 세명의 의료진이 치어리더가 되어 나를 응원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이 때 이미 아기 머리가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말이다, 직접 출산이라는 경험을 해보면서 깨달았다. 출산 장면을 담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을 많이들 보았을 것이다. 그 장면들, 다 극적인 과장일 뿐이다. 비명을 지르면 힘이 분산되기 때문에, 비명조차도 지르지 못하게 했다. 숨도 참고 비명도 참고 모든 힘을 항문쪽으로 모아 끄응~ 끄응~ 줘야 한다. 코로 들이마셔서 입으로 길게 호흡을 내쉬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데, 통증이 심하니 짧고 숨가픈 호흡만을 하기 마련, 힘주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도 호흡을 길게 이어갈 수 있도록, 출산 전 분만 호흡법 연습을 해야만 한다던 각종 강의 내용이 구구절절 맞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헛힘만 쓰면서, 시간을 허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말 잘한다, 숨 쉬고 힘 줄 때마다 옆에서 같이 소리 질러주고 외쳐주던 간호사들과 의사도 점점 지쳐갔다. 의사 어깨 너머로 보이는 창밖의 하늘이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당사자인 나마저도 수축이 없는 짧은 시간에 깜빡 졸고 싶은 기분까지 들 정도로 잠이 쏟아졌으니, 밤새 그런 나를 바라보며 케어해 온 세 사람은 오죽했을까 싶다.
출산 가능할거라고 했던 30분이라는 시간은 벌써 지났고, 어느새 1시간을 훌쩍 넘겼다. 불쌍한 담당 교수님. 내가 본격 출산을 시작하고 아기 머리가 보일 때 호출이 갔었나 보다. 한 시간이 지난 뒤, 당직의는 다시 교수님께 연락해서 수술해야할 것 같다고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결국 직접 찾아오셨고, 교수님이 오시니, 또 출산 치어리더 의료진분들께서 다시 힘을 내서 치어리딩을 하기 시작했다. 그 응원에 힘입어 나도 귀에 들리는 지시대로, 시키는대로 움직이니 또 아기 머리가 보였나보다.
여기까지 온 게 아까우니까
한 시간만 더 해봅시다.
그렇게 교수님은 떠나고, 이제 진통이 없는 시간 동안 당직의사와 토크쇼를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매스컴에서 보는 출산 장면은 실제와 매우 다르다. 10시간 진통을 했다고 하면, 10시간 내내 아픈 것이 아니다. 호르몬들간의 조화에 따라 아픈 주기와 아프지 않은 주기가 반복되며 계속 이어진다.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아프지 않는 타이밍일 때는 전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편안하고 졸릴 정도로.
"이 방(진통실)에서 분만실로 넘어가려면 어떤 상태여야 하나요?"
- 아기 머리가 5센티 이상은 보여야 되요.
"저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 솔직히 말하면, 아까 진통 시작했을 때 그 때가 제일 많이 보였어요. 8미리?
"분만실로 가면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요?"
- 그 방으로 가면 바로 끝나요. 힘 다섯번? 아니 3번만 주면 끝나요.
출산하는 당사자인 나마저도 진통이 없는 시간대에는 눈 감고 졸다시피하는데, 밤새 분만을 돕고 있는 의료진들은 오죽 피곤하랴. 다들 지쳐서 실신 직전인 표정들. 이제는 응원도, 지시도 없이 침묵 속에서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지경까지 왔다. 하지만, 나는 힘을 주는 수 밖에 없었다. 자궁이 수축하기 시작하면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통증이 밀려오는데, 그 아픈 타이밍에 출산하겠다고 힘을 주면 아픔이 경감되었기 때문이다. 같이 밀어내는 힘들끼리 결합되어서 그런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힘을 줘야 안아팠기 때문에 혼자 계속해서 힘을 줘야만 했다. 다들 포기하고 1시간을 더 채운 후 담당교수님께 수술로 가자고 말할 타이밍만 찾고 있는 분위기.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그제서야-그러나 다행히 너무 늦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자연분만을 할 때는 의료진은 판을 준비해주고, 지켜보며 응원하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없다. 나머지는 아기와 산모 두 사람의 몫이다. 그랬기 때문에 힘을 어떻게 주면 된다, 그리고 호흡을 어떻게 해라, 다리를 어떻게 해라, 지시하고 눌러주고 잡아주는 행위들이 힘을 내는 데에는 도움이 되긴 했는데, 나에게는 그렇게 좋지 않은 방법이었던 것 같다. 원래 몸쓰는 것이 둔했던 나는, 혼자 버려져(?) 힘을 주는 동안, 아까 어떻게 했을 때 칭찬을 많이 받았는지를 되새겨 볼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 방식을 떠올리며 힘을 주기 시작하니, 다시 의료진들의 목소리에 생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출산 시작한지 1시간 30분을 허비하고서야, 애 낳는 법을 깨닫다니!
그 때가 새벽 6시 30분쯤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번, 진통이 올 때 힘을 주고 있노라니, 갑자기 의료진 모두가 큰 소리를 지르며 부산하게 움직이시 시작했다.
"힘 주지 마세요! 저쪽 방 가서 낳을게요!"
사실 새벽 5시에 이미 분만실 준비는 다 갖춰져 있는 상태였다. 분만실로 침대채로 실려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힘을 줘야 내가 안아픈데, 힘을 줘야 내가 사는데......그렇게 분만실 침대(?), 의자(?)로 위치를 이동한 후 힘을 한 번 더 줬다. 겨우, 이 방으로 넘어오긴 했는데, 이제 더 힘 줄 힘이 없구나. 진짜, 난 이제 지쳤어.... 잠깐의 휴지기를 지나 다음 수축이 찾아왔다. 힘을 안주면 아프니까, 힘이 있건 없건 다시 힘을 주는데... 뭔가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분만실로 넘어가 힘 한번 반 줬는데, 다 끝났단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 와중에 남편도 수술복과 모자를 쓰고 들어와 탯줄을 자른 것 같아 보였고, 발 아래 테이블에 아기를 놔두고 열심히 닦으며 소아과 담당선생님이 검사를 하시는 것 같아 보였다.
아기는 건강하다는 얘기도 들리고, 빼애빼애 울어대는 소리도 들렸다. 열심히 뒷수습을 다 마친 아기와 함께 남편이 사라진 것도 보았다. 하지만, 나는 끝이 아니었다.
그 이후 태반을 마저 빼는 작업, 회음부를 다시 봉합하는 뒤처리 과정이 이어졌다. 출산 과정에서의 진통은 쿵짝쿵짝, 아픈 타이밍과 아프지 않은 시간이 함께 이어져서 그나마 견디기가 쉬었던 것 같은데, 뒷처리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자극과 통증으로 이어지니까, 통증의 강도는 약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견디기 힘들었다. 고정기구로 고정하는 것 같은 느낌, 닦아 내고 벌려주고 잡아주는 자극자극자극.... 무언가 액체가 몸 밖으로 꿀럭꿀럭 대며 빠져나가는 느낌.
아기를 출산한 시간은 7시 15분인데, 뒷처리 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경과되었으면, 아침 교대조까지 수술복을 입고 들어왔다. 벌써 8시냐 하시며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 받는 걸 보면서 시간을 짐작할 뿐이었다. 아기를 출산한지는 한참이 지났는데, 8시가 될 때까지 끝나지 않은 나의 뒷처리, 주간 근무조의 출근으로 시간의 경과를 눈치채고 나니 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이 순간들이 끝나지 않는게 아닌가 두려워지기 시작할 때쯤, 드디어 끝이 났다는 담당교수님의 사인이 났다. 순간, 당직의들이 "선생님!"을 외쳤다. 그러자 갑자기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의료진 수십명이 우르르 뛰어들어와서 내 몸을 닦고 분만실 정리 및 뒷수습을 일사분란하게 진행하기 시작했다.
아유, 이제 둘째 낳아도 되겠네
교수님의 덕담(?)아닌 덕담을 들으며, 밤새 함께 씨름한 의료진들에게 감사를 하며 침대에 실려 역방향으로 진통실로 이동했다. 3인실 병실이 다 차 있어서, 어제밤을 신세졌던 진통실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시간은 8시 15분. 인사를 하고 가는 당직의사에게 창밖을 보며 한마디를 날렸다. 밤새 마취의들이 출근할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어깨 너머로 하염없이 바라보던 창밖 하늘, 그 하늘이 이제는 파랗고 파랬다.
어휴, 밤새 저 창문 밖 하늘을 얼마나 쳐다봤었는지...
웃으며 당직의는 퇴근을 했고, 잠시 후 갓 태어난 아기가 침대에 실려 들어왔다. 전국병원들 중 신생아 모자동실이 가능한 몇 안되는 병원에서 출산한 바람에, 출산 후 2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24시간 모자동실시스템이 시작된 것이다.
너무나 작고 부숴질 것처럼 생긴 아기인데, 일단 가슴에 얼굴을 갖다대니 입을 열고 쪽쪽 빨아댔다. 젖이 나올리가 없으니, 잠시 후 다시 옷을 수습하고, 우리 부부에게 주어진 첫 미션, 아기 분유 5밀리 먹이기를 수행했다.
밤새 그 난리를 쳤는데, 신기하게도 아프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아드레날린 과다분비와 진통제의 힘덕분이었던 것 같다.
일반적인 출산 속도로 계산하면 오후 2시나 되어서야 분만할거라고 생각한 의료진이 7시 10분 아침 식사까지 신청해놨는데, 7시 15분에 출산을 하는 바람에 신청해둔 밥을 놓쳤던 것이 못내 아쉬울 정도로 허기가 졌다. 오전 8시, 영업하는 음식점을 찾기 애매한 시간. 24시간 영업하는 국밥 같은 건 내 취향이 아니었기에, 출산 후 첫 끼니는 김밥과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아, 아이스커피 먹어본 것이 언제적 일인지, 모유수유를 시작하게 된다면 또 눈치를 봐야겠지만, 오랜만에 맘껏 들이킨 커피는 정말 시원하고 맛있었다. 정상분만의 장점이 바로 이거구나. 출산 직후부터 먹고픈 것 마음껏 먹어도 된다는 것.
아직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