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응급실도 가보고....
앞서 시댁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님이 드디어 제사에서 해방되셨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그렇다면 첫 해방의 명절은 어땠을까? 우리는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 어머님이 참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내가 명절에 해외여행도 와보고 너무 좋다." 하셨더랬다. 시부모님, 나, 남편, 시누이 4 식구 모두 싱가포르로 출국했다.
호텔 내 수영장에서 물놀이도 하고, 호커센터에 가서 칠리크랩도 먹었다. 멀라이언도 보고 신나게 여행을 즐겼다. 그러다가 점심을 먹으러 어느 딤섬 뷔페에 들어갔을 때였다. 남편이 갑자기 심장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심장이 조여 오는 느낌이 난다며 숨쉬기를 어려워했다. 나는 순간 응급상황이라고 판단되어 벌떡 일어나 남편을 데리고 무작정 나왔다. 혹시 심근경색이나 심장 쪽 문제면 어쩌지? 그렇다면 정말 시각을 다투는 초응급 상황일 텐데.. 해외 119는 몇 번이지? 911인가? 그건 미국 아닌가? 싱가포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조선족으로 추정되는 아주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남편이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하니 자기를 따라오란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따라나섰다. 골목 사이를 지나 들어간 병원은 작은 의원이었는데, 그마저도 양방은 아니고 한의원인 듯했다. 만약 정말 심장 문제라면 이 병원은 아닌 듯했다.
문득 공항에 내릴 때 우수수 쏟아진 문자가 떠올랐다. 위급한 상황이 있을 경우 영사관으로 연락 달라는 그 문자! 나는 지체 없이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한국어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듣자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어 울음이 나려고 했다. "지금.. 남편이... 심장 통증을 호소하는데... 병원을 좀 알아봐 주세요." 울음이 목에 걸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전화를 받아주신 분께서 진정하라고 하시며 병원 리스트를 보내줄 것이고, 이 중 한 병원은 한국 통역이 있다고 알려주셨다. 지도를 찾아보니 마침 통역이 있는 그 병원이 가장 가까워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
남편에게 어떠냐고 물으니 여전히 조여 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택시를 재촉하여 병원에 도착했고, 응급실 입구가 보이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남편을 돌봐줄 의료진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한국 통역이 있다고 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그 코디네이터는 부재중이라고 했다. 그래도 병원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고, 전공 덕분에 전문 용어를 알아듣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니 100% 수월한 의사소통은 어려웠지만 대충은 소통이 가능했다. He feels heart discomfort.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증상을 설명했다. 마르고 안경을 써 깐깐해 보이는 의사 선생님이 이것저것 질문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는지. 벌써 몇 년이 지난 일이라 무슨 검사를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심전도 검사를 했을 것이다. 아무 이상이 없었고, 의사는 조금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고 했다.
두어 시간쯤 지나 조금 상태가 나아지자 남편은 숙소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의사에게 이야기하니 의사는 대번에 안된다고 거절했다. 하룻밤 정도 병원에 머무르면서 상태관찰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남편도 고집을 부렸다. 숙소에 돌아가고 싶다고. 의사는 퇴원 후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면 퇴원이 가능하다고 했다. 기어이 각서를 쓰고 퇴원했다. 내 기억에 타이레놀 성분의 약과 위장약을 처방받고 퇴원했다. 그래도 약사라고 병원 약국이 궁금해서 유심히 들여다본 기억이 난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 원내약국과 크게 다른 점은 없어 보였다. 투약구에서 복약지도하는 약사와 그 너머로 보이는 약품 진열장. 병원비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30만 원가량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50만 원 이던가..?) 다행히도 여행자 보험을 들어놓았기 때문에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들을 챙겨서 돌아와 일부 돌려받았다.
숙소에 돌아오니 7시가 넘은 저녁이었다. 시부모님과 시누이 가족은 걱정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심전도 검사 결과 등에는 이상이 없었다고 말씀드리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나가 근처를 산책했다. 그래도 당장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해서 안심이 되었고, 무사히 숙소에 돌아와 가족들을 만나니 기분이 좋았다. 아직도 그때 그 밤공기, 물 위에 떠있는 보트, 지나가다 들렀던 와인 가게 등이 기억난다.
한국에 돌아와서 남편을 응급실에 보냈다. 당장은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기에 퇴근 후 대학병원의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마침 그때 병원에 다니고 있었기에 내가 다니는 곳으로 결정했다. 히스토리를 듣더니 역시 심전도 검사를 했고 아무 이상이 없었다. 24시간 홀터 검사를 제안해서 하루 동안 기계를 달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홀터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찾아간 외래에서 심장내과 교수님이 조심스럽게 '이런 비슷한 일이 또 생기면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해 보라'라고 조언해 주었다. 아마도 공황장애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여행을 가기 전 남편은 격무에 시달려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공황을 의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몇 번이나 심장이 조이는 통증을 느꼈는데 그 시점이 바로 남편이 사무실에 들어갈 때였기 때문이다. 남편은 호흡이 어렵고 통증을 느낄 때, 사무실에서 나와 다른 공간에서 업무를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 좀 진정이 되고 나아졌다고 한다. 남편도 나와 같은 과라 약을 먹지 않고 버텼다. 또 고집불통의 기질이 있기 때문에 병원에 가서 약처방을 받으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약에 의지하고 싶지 않다며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장소를 옮기거나 심호흡을 하며 견뎠다. 점차 증상이 완화되고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증상이 없다.
남편은 공황장애가 아주 심하게 온 편은 아닌 것 같다. 병을 키울 수도 있으니 우리 남편처럼 무턱대고 참으시면 안 된다. 요즘 약이 아주 잘 나와 있으니 담당 선생님과 상의하시어 적절히 도움을 받으시면 좋겠다.
나와는 거리가 멀 것 같던 응급실도 살다 보니 여러 번 가게 되는 것 같다.(심지어 외국의 응급실이라니.) 지금이야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때는 정말 남편을 잃는 줄 알고 너무 무서웠었다. 다들 건강 잘 챙기시고 병원 없는 삶이 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