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pc민코치 Apr 28. 2020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일들

좌충우돌 코치되기


2015년 이야기     

 2년 4개월간의 쿠웨이트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날짜가 5월 28일이었다. 일주일간의 복귀 휴가가 끝나고 출근을 하자마자 바로 이야기했다. 나 6월 14일부터 일주일간 휴가 또 써야 한다고. 무조건 가야 된다고.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쳐다봤다. 혹시나 한국에 복귀하자마자 긴 휴가를 가기 위해서 2주간 쉰다면 모를까, 느닷없이 2주 근무하고 또 휴가를 쓰겠다는 것은 무슨 경우냐고 했다. 그래도 팀장님이 쿨하게 봐주셨다. 자기 휴가 자기가 쓰는 걸 두고 뭐라고 하겠냐고. 참 감사했다.     

 하지만 당연히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대체 무슨 일로 휴가를 그렇게 가는지 많은 사람들이 물어왔다. 예전 같으면 대충 얼버무렸겠지만, 이제는 내 표현을 명확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야말로 회사에 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러저러해서 미국을 간다고 이야기했다. 비용도 무려 1500만 원 가까이 들어간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러자 조언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졌다.     

 ‘회사에서 보내주는 것도 아니고 그 금쪽같은 휴가를 그런데 쓰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아?’

 ‘한국에도 얼마든지 좋은 강연들이 있는 거 아니야?’

 ‘너희 와이프가 뭐라고 안 해? 그걸 가게 둬?’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올 때 양주나 좀 사 와. 회식하자’


 이런 말들은 그냥 가벼운 인사였다. 하지만 가끔은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거 괜히 갈 필요 없어. 다녀와 봐야 인생 바뀌지 않아’

 ‘그거 하면 뭐 회사라도 그만둘 수 있을 거 같아?’

 ‘그래 봐야 네가 하는 이야기 세상에 아무도 안 들어줘’

 ‘참 세상에 별종들 많긴 하겠지만, 너도 그런 별종인지는 전혀 몰랐다’     

 그런 말을 들으면 홀로 사막에서 울던 기억이 떠올랐다. 거기에서조차 혹시 다른 사람이 나를 쳐다보지 않는지 놀랬던 나 자신을 후회했었다. 이제는 그렇게 바보같이 눈치 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별 대응도 하지 않고 웃어넘겼다. 그리고 나면 마음도 편해졌다. 그래도 인격적으로 조금이나마 컸구나. 그간 마음 써온 것들이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웃기도 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 마음에 떠오르는 이야기들은 있었다. 이전의 내 모습의 잔상이랄까. 욱하고 떠오르는 한마디들. 상대방의 가슴에도 분명히 상처를 내고 말겠다는 촌철살인의 문장들.     

 “글쎄요. 지금 손목에 차고 계신 명품 시계보다는 더 나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만.”

 “제가 별종이어서 다행입니다. 다른 인생을 살아볼 가능성은 저에게만 있을 테니까요.”     

물론 그 이야기를 꺼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나 자신을 경계하는 말귀로 삼았다. 외부에 드러나는 나를 과시하기 위한 과소비는 하지 말자는 것, 그리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리다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 이 두 가지만 잘 지켜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큰 실수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6월 14일. 이런저런 해프닝들을 뒤로하고 드디어 미국으로 향했다. 집을 나서는데 근처에 사시는 어머니가 오셨다. 그리고 봉투에 담긴 1,500불을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셨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셨다.     

 “너 유학도 못 보내줬는데, 이렇게라도 공부하러 멀리 간다고 하니 그 비행기 값이라도 내가 해주고 싶구나. 가서 많이 배우고 와. 나이 들어서도 뭐라도 배우겠다고 하는 아들이라 기특하구나.”     

그 당시에는 얼떨결이라 그냥 감사하다고만 말씀을 드리고 공항으로 향했다. 정신없이 체크인을 하고 비행기에 올라타서 강연들은 것들 정리한 것을 요약하고 하다 보니 어느덧 미국에 도착할 즈음이었다.     

교육 장소는 샌프란시스코 실리콘 밸리였다. 신혼여행으로 갔던 하와이를 제외하고 미국 본토에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공항에 내려서 샌프란시스코 공항이라는 글자를 보는데 정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정말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이렇게 새로운 배움에 끌려 여기까지 와보기도 하는구나.”     

그러자 갑자기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나이 들어서도 배우려는 아들이라 기특하다면서 쥐어주신 큰돈도 이제 생각났다. 이 돈을 챙기면서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아이를 둘이나 두고도 방황하는 아들이 걱정되셨을까. 아니면 정말 새로운 배움을 향하는 나를 응원하고 계신 걸까. 아마 두 가지 모두 공존했을 것 같다. 그 상황에 나를 놓아봐도 그 두 가지가 모두 떠오를 테니까.      

그러고 나서 갑자기 울컥했다. 시간이 흘러서 생각해봐도 그 시간의 울컥함의 원인을 잘 모르겠다. 얼핏 생각해보면 꽤 많은 마음고생을 해온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공항에서 실리콘 밸리로 이동하고, 이벤트 등록을 하고 숙소에 짐을 푸니 긴장도 함께 풀렸다. 그렇게 CHPC 코치 인증을 받는 날이 다가왔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위 문화충격을 받으면서 첫 CHPC 인증을 마쳤다.


2017년의 이야기     

 2015년에 코치 인증을 받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실제로 누군가를 코칭을 해보지는 못했다. 미국과 독일에 있는 다른 코치들과 서로 코치를 해주는 경험만 해보았을 뿐, 내 주변의 누군가에게 코칭을 하겠다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료는 너무나도 디테일하게 갖춰져 있었다. 브랜든과 다른 코치들의 수많은 경험과 연구로 만들어진 자료였으니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대체 네가 뭐라고 다른 사람들을 코칭하겠다는 거야. 그 교육받고 왔다고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신이라도 한 거야?”     

누군가가 이렇게 딱 한마디만 하면 도저히 대응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시작도 못하고 주저했다. 그냥 다른 코치들에게 내 삶을 두고 코칭을 받으면서 더 나아지는 것을 직접 경험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년간 정말 열심히 코칭받은 대로 삶을 바꿔 나갔다. 매일 출근길과 퇴근길에는 브랜든의 강연을 들으면서 공부하고, 점심시간에도 샐러드 사 먹으면서 시간을 아껴서 강연을 들었다. 들은 강연을 듣고 또 듣고를 반복했다.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다가도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힘이 났다. 그 안에 들어있는 열정과 에너지가 나를 자극했다.      

 처음에는 그저 허겁지겁 배우고 또 배우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반복해서 들으면서 어느덧 내 안에 그 말들이 많이 자리 잡게 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회사에서도 어느덧 이전보다 훨씬 인정받는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샌디에이고의 멋진 호텔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 남짓 날아서 LA 공항에 도착해서 국내선을 갈아타고 샌디에이고로 향했다. 감기가 걸려서 힘든데 비행기 두 번 타고 내려서 또 밴을 타고 호텔에 도착하니 진이 다 빠졌다. 거기다가 이 호텔에는 들고 간 햇반을 데울 커피포트도 없고, 전자레인지는 스타벅스에만 하나 있었다. 2년 전에 호텔 식사가 얼마나 비싼지를 배웠던 탓에 햇반을 챙겨갔는데, 익혀먹을 방법이 딱히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침마다 스타벅스 가서 공짜로 밥을 데워달라기 미안해서 그냥 숙소에 세면대에 뜨거운 물을 틀고 햇반을 넣어두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음식이 익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3분 요리들은 나름 따뜻했다. 그래서 덜 익은 햇반에 카레나 짜장을 부어서 일단 먹었다.     

 하지만 3일쯤 그렇게 식사를 때우려고 보니 결국 탈이 났다. 코칭 과정 자체도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그런데 감기와 속 아픔이 함께 찾아오니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있어야 했었다.     

 그렇게 거의 하루를 다 날리고 침대에 있다 보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후회가 밀려왔었다. 이게 지금 어떻게 다시 온 교육인데 그냥 눈 딱 감고 사 먹으면 될 일을 이런 꼴을 만들고 만 걸까. 어쩜 이렇게도 미련한 걸까. 그 돈이 대체 몇 푼 된다고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걸까.     

 대신 그때의 경험은 나중에 내가 빠르게 지방 강연을 다닐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미국까지 날아가서 교육받는 상황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드러누워 있을 만큼 몸 상태가 나빠지지 않았을 테니까. 혹시나 내 강연을 오고 싶어 하시는 분들은 최대한 덜 이동하고 강연에 오셔서 더 집중할 수 있게 해 드리겠다는 마음이 크게 자리 잡았다.     


2019년 이야기     

 2017년 교육을 받고 돌아와서는 이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 그래서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무료로 이런저런 코칭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마치 그저 대화인 듯 코칭인 듯 구분 가지 않는 선으로. 그러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

 그렇게 회사 내에서 몇몇은 지인들에게 코칭과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은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이루어졌다. 퇴근 시간에 맞춰서 회의실을 빌린 후, 그곳에 모여서 동아리 모임을 하듯 강연을 했다. 물론 비용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강연 내용이 좋았던지, 한 번 시작한 강연은 매주의 정례 행사처럼 이루어졌다.

 물론 이런저런 마음 상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다들 각자의 부서에서 느닷없이 늦는 일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보면 강연장에 혼자 서서 기다리다가 시간이 끝나서 돌아가는 날도 많았다. 오지 못한 사람들도 엄청나게 미안해했다. 하지만 같은 회사에서 그 사람들의 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니 그냥 혼자 답답해해야 했다. 열심히 준비해 온 강연장에서 혼자서 한 시간을 기다리는 기분은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그런 시간들을 겪은 덕분에, 강연장에 사람이 한 명만이라도 있으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모든 에너지를 그 한 사람에게 쏟아부어서 그 사람의 삶에 조금이라도 진정한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큰 배움이었다. 코치로서, 그리고 강연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중에 세상에 나서게 된다면 그만큼 중요한 마음이 없을 테니까.     


 코칭과 강연을 시작하게 되자 계속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혼자서 공부하는 것과 강연을 준비하는 것은 배움의 깊이가 완전히 달랐으니까. 마침 회사에서 학생들에게 멘토링을 해주는 프로그램에서 직원을 모집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고등학생들에게 대학생들이 과외를 해주고, 회사 임직원들이 이 학생들을 모두 멘토링을 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배워왔던 것을 전해주기에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고, 처음으로 나를 소개하면서 코칭 전문가라고 이야기했다. 말하면서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회사 안에서 나보다 전문가는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렇게 운 좋게 임직원 멘토로 선정이 되어 학생들을 만났다. 대학생들 전체에게는 한 달에 한 번 두 시간씩 강연을 해주었다. 물론 강연을 오는 것은 학생들의 자유였기 때문에, 많은 숫자의 학생들이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꼭 참석해주는 학생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강연이 끝나고 나면 다 같이 가서 회사 주변의 맛집도 돌아다녔다. 회사 지원금 만으로는 워낙 모자라서 내 돈을 들여가면서 다녀야 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이 친구들이 마음도 몸도 모두 든든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 직속 담당인 학생들에게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코칭도 진행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2018년에도 연속해서 임직원 멘토로 선정이 되었고, 2017년의 학생들이 지속해서 강연에 참석하면서 강연에 오는 학생 숫자도 제법 늘어났다.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들이었고 많은 학생들이 스피치 강연을 부탁해서 그 강연도 열심히 준비해서 해주기도 했다. 매주 회사 지인들에게 해주는 강연과 학생들에게 해주는 강연들이 겹치면서 정말 몸이 두 쪽이어도 모자랄 만큼 바쁜 날들이 이어졌지만,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회사 일에서도 성과를 내고 있었고, 강연과 코칭을 통해서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축복 같은 시간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정말 열심히 일하고 코칭과 강연을 이어갔다. 그 결과 2018년 연말에는 사회봉사 우수상을 받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즐겁게 하는 사람이 제일 잘하게 된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경험들을 들고 다시 미국을 향했다. 이번에는 나 말고 다른 한국 사람이 드디어 코치가 되겠다고 그곳을 찾아왔다. 윤스키라는 분이었다. 그곳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서 한국말로 저녁 식사를 하는 순간이 찾아오다니! 더구나 그분의 지인분들이 함께 어울려서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또 다른 한국 사람의 등장은 나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누군가는 경쟁자가 생긴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 그냥 내가 지금 선택해서 이어가고 있는 길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사실 너무 많이 외로웠으니까.     

 ‘왜 나 말고는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걸까? 내가 정말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건 아닐까? 한국이라는 시장에서는 통하지 않을 선택이었던 것이 아닐까?’      

 그저 혼자 불안해하던 그 질문들을 지워내는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것, 정말 같은 길을 걸어갈 동지가 생겼다는 것에 마냥 즐거웠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그 교육장의 열광적인 분위기에 나도 동화되고 있었다. 여전히 춤을 추고 뛰어다니는 것 까지는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너무나도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들이라고 느끼고 있는 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에 욕심이 하나 생겼다. 나도 이렇게 멋지고 즐거운 강연을 해봐야겠다는 욕심.     

 그렇게 마음의 위안을 얻으면서 시작한 3번째 코치 인증 교육은 내내 즐거웠다. 일단 코칭 자료들이 익숙해져서 온전히 내 안에 있었고, 분위기를 즐기기 시작하니 사람들과의 대화도 쉬웠다. 영어도 조금 더 늘었고, 코칭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나에게 얻어가는 것들이 있다는 느낌을 받으니 자신감도 커졌다.      

 그렇게 교육을 마치고 돌아왔다. 더 큰 목표가 생겼다. 이제는 정말 세상에서 코치로서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나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강연을 열었고, 2019년 7월 31일 첫 강연으로 드디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코치가 되기로 결심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