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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연 Dec 23. 2023

짝꿍

올가 토카르추크·요안나 콘세이요, 『잃어버린 영혼』, 사계절, 2018


나는 언제나 일이 우선이었다. 일로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사람들은 내게 일을 미루고 무리한 요구를 당연한 듯했다. 나는 성실한 호구였다. 힘드니 즐거움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좋은 걸 봐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나의 시간과 나의 꿈은 내 인생에서 밀려났다. 취미도 없어졌다. 나 자신 또한 내 인생으로부터 나가떨어졌다. 영혼을 잃어버린 적막은 무채색이었다.

『잃어버린 영혼』은 설경 속 장갑을 한 짝씩 나눠 낀 아이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얀과 영혼의 모습이다. 현대인의 번아웃처럼, 일을 아주 많이 빨리 하는 얀이 영혼을 잃어버린다. 영혼은 얀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어린아이 일 때는 함께 있던 영혼을 크면서 잃어버렸다. 얀과 영혼은 같은 나이였다가 얀만 커버린다. 얀은 도시 변두리에 집을 구해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영혼을 기다리기로 한다. 영혼은 먼 길을 돌아 상처받은 모습으로 얀에게 돌아온다. 얀은 이제 영혼이 따라올 수 있는 속도로 천천히 살아간다. 글 작가인 올가 토카르추크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도 알려져 있다. 『잃어버린 영혼』은 작가의 또 다른 책 『방랑자들』과 닿아 있다.

일러스트 작가 요안나 콘세이요는 2018년에 볼로냐 라가치 스페셜 멘션을 수상했다. 2020년 6월 ‘요안나 콘세이요 : 잃어버린 영혼’전과 함께 열린 이지원 번역가의 북토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잃어버린 영혼』의 일러스트는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회계장부에 샤프를 심 두 개를 겹쳐서 그렸다고 한다. 노동이 고스란히 보이는 선들이 차분한 화면을 만든다. 회계장부의 페이지를 나타내는 도장과 오래된 종이의 얼룩은 시간을 품었다.

북토크에서 작가들의 작업 과정을 알 수 있었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글을 쓰고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내 앞에 있는 것을 감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느꼈다. 요안나 콘세이요가 그림을 투쟁이라고 표현하고 스케치 수첩은 자기 검열과 리터치가 없다고 표현한 부분에서 작가의 고민이 전해졌다. 『잃어버린 영혼』의 글과 그림이 짝을 맞춰 나의 마음과 시간을 되돌아보게 한다. 영혼이 얀을 찾아오는 과정은 무채색이지만 영혼이 얀의 집에 도착한 후부터는 그림에 생기가 생긴다. 식물이 집을 채우고 색상이 화면을 물들인다.

영혼을 잃어버린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쳤다. 회복을 위해 애쓰는 것도, 멈춰서 기다려도 됨을 아는 과정도 힘들었다. 영혼을 잃어버린 채로 절망에 빠져 웅크리던 시간도 있었기에 이제는 천천히 내 영혼이 다시 나를 찾아와 주기를 기다린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에도 안 먹던 맛의 과자를 고르고 가보지 않은 도서관에 들어가 보면서 사소한 시도로 내 하루에 색을 조금 칠해 본다. 처음부터 짝꿍이었기에 기다리면 결국 만나게 될 테다. 먼 길을 돌아와도 되고 상처받은 모습으로 와도 괜찮다. 내 곁에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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