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아시스 Dec 19. 2022

더 로드

식인의 세상에 맞서는 불씨

원작이 있는 영화다. 작가는 코맥 매카시.


코맥 매카시의 국경 3부작이 유명하다. 난 두번째 작품 ‘모두 다 예쁜 말들’이라는 작품으로 만든 영화를 보고 마지막 세번째 작품 ‘평원의 도시들’을 읽었다. 예전에 봤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의 원저자임을 알게 되자 호감도가 급하락했다. 너무 오래 전에 봐서 기억은 안 나지만 잔인함에 살까지 떨렸던 기억만 아련하게 남아 있던 영화였다. 미국의 세익스피어라고 불린다는 작가의 글은 내게로 오기까지 천리길 같다.


‘평원의 도시들’은 황량한 서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남자들만의 이야기다. 작가가 여성을 보는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물론 번역한 글을 읽어서이지만 문체도 내게는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호평을 받고 있는 작품이지만, 아니 국제적인 인지도가 있는 작품이지만 나에게는.... 코맥 매카시 작가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아주 다른 문화에서 싹튼 인간 유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로드’라는 영화를 다시 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비고 모텐스였다.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이라면 뭐 더 생각할 것도 없다.

 

영화 내용은 이렇다. 이유는 애매하지만 지구는 자연재해로 멸망 상태다. 나무는 썩어서 쓰러지고 물은 거의 검정물 투성이다. 아내는 더 이상 이런 세상에서 살 수 없다며 어둠 속으로 나가 사라진다.(자살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끔찍한 일을 겪기 전에 자살을 택한다. 끔찍한 일이란 식인. 동물은 이미 잡아먹어서 멸종되다 시피했고 사냥꾼이란 사람들은 죽지 않은 남은 사람들을 사냥한다. 사람들을 지하실에 발가벗겨 가두고 한 명씩 끄집어내어 돼지를 살육하듯 사람을 잡아 먹는다. 책에서는 여자에게 일부러 임신 시켜서 아이를 낳게 한 후 갓난 아이를 잡아먹는 장면도 있다고 한다. 영화로 표현되었다면 아마도 심정지. 사냥꾼들은 총을 들고 다니며 광기에 쩔은 폭력을 휘두른다.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면모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인간일 수 있을 때 죽음으로 끝을 짓는 길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지구 종말 상황이다.  


요한계시록에나 등장할 종말적인 상황 속에서 주인공인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는 여정에 오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질문이 떠오른다.

“동물처럼 도륙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희망을 갖고 살아가야 하나? 조금이라도 인간적일 때 내 손으로 죽음을 선택해 끝을 맺는 게 옳은 일일까?"

작가가 산다는 걸 어떻게 생각했을 지 궁금해졌다. 코카콜라 한 캔을 먹는 일이 기적일 수도 있는 세상에서 왜 아들을 살아가게 하는 걸까. 순간순간 잔혹한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의 연속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남게 하는 걸까. 마음의 불씨를 꺼뜨리지 말라고, 만나게 되는 사람이 마음에 불씨를 간직한 사람인지 알아봐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는 아버지. 그나마 주인공인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아들을 보호하지만 지속된 폐병과 화살에 맞은 상처로 죽고 만다. 그런데도 아들에게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제 겨우 10살을 넘은 아들에게 말이다.


자살만이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킬 가장 좋을 방법인 종말의 시대에 작가는 아들을 왜 살아남게 해서 남쪽으로 가게 하는 걸까. 행복이 아니면, 의미가 없으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내게, 살아남기 위한 전투적인 삶에 대해 작가는 물음표를 던진다.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서, 오로지 그 이유 하나가 살아남아야 하는 의미 전부라면 작가는 개인주의 삶에서 떠나 함께 따땃한 불을 지피는 전지구적인 삶을 살아보는건 어떠냐고 말하고 있는 건지. 그럼 가장 어두운 욕망을 그리면서 가장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었다는 말일까?   


아니면 작가는 앞으로 올 미래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식인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돈으로 인간의 목숨까지 포함해서 총체적인 걸 사고 팔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 우리의 소비가 사실 식인일수도, 우리의 성공지표가 식인일수도, 우리의 사랑이 식인일 수도.

 

책으로 읽고 싶은 마음도 살짝 들지만 유독 인간의 어두운 본성과 욕망을 파헤치는 작가라 읽지 않기로 한다. 내 취향이 아니다. 잔인하다. 소름이 돋는다. 난 식인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종말의 세상에 아이들을 남겨두지 못 할 거 같다. 그래도 묻는다. 그리고 질문은 바뀌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간직해야 할 불씨가 무엇인지요? 우리가 꺼뜨리지 말아야 할 불씨를 난 오늘도 태우고 있는 걸까요?”  

작가의 이전글 몸의 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