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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료 Oct 22. 2021

사서 고생하기 (feat. 험난한 완모의 길)



1



'모유수유의 길' 이라는 제목을 적어놓고 잠시 숨을 고른다. 

하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2




임신했을 때부터 나는 꼭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마음은 모성애가 아닌 일종의 도전 정신에서 발동됐다. (임신했을 때는, 특히 첫째를 가진 산모에게 모성애는 파랑새 같은 존재...)


인간은 누구나 이상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떨어지는 체험을 하고, 산소통 없이 수심 30m 바다밑을 다이빙 하며, 목숨을 걸고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오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서 고생하길 좋아한다.  


내게 모유 수유도 그와 비슷했다. 출산보다 더 힘들다 알려진 젖몸살 같은 난관이 곳곳에 도처해서 성공율이 낮다는 '완모'의 길을 직접 걸어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에베레스트 산은 커녕 동네 뒷산도 가본 적 없는데, 운동화 신고 무작정 나간다고 정상까지 도달할 턱이 없으니까. 산에 가 본 사람들의 성공담과 실패담을 들어보고, 뭘 준비하면 좋을지 고민도 해 보고, 위험 상황을 대비한 응급약도 구비해 두어야 할 것이다. 



(조금 서둘러 밝히자면 모유 수유의 경우, 니플 크림과 양배추, 성능 좋은 유축기를 꼭 준비해야 한다. 수유 패드와 모유 저장팩은 나중에 사도 늦지 않다. 애를 낳으면 정수기에서 물 나오듯 모유가 절로 콸콸 나올 것 같지만, 아기 목 축일 정도만 간신히 나오는 경우가 다반사니까.) 






임신 초기부터, 생각날 때마다 모유 수유와 관련된 유튜브 동영상을 봤다. 분유와 관련된 정보는 일절 찾아보지도 않았다. 젖병 소독기나 브레짜 같은 육아 용품은 구매 리스트에 두지 않았다. (소심하게 마음 속 장바구니에 넣어두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동영상을 시청한 결과, 딱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는 걸 알았다. 







깊게 물려라. 

유륜까지 앙. 






3



해오가 태어난 지 한 시간이 흘렀을 때쯤, 마음이 약간 조급해졌다. 



태어나자마자 젖을 물리면 좋다는데, 

왜 아무런 지시가 없지. 



분만이 끝나고 새로 출근한 미드 와이프는 종일 나를 돌봐주던 미드와이프들에 비해 어쩐지 전문성이 떨어져 보였다.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썼는데, 시력이 좋지 않아서인지 아기 바디 수트를 입히지 못해 허둥댔고 - 결국 내가 입혔다 - 몸무게를 잴 때도 아기를 다소 거칠게 다뤘다.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게 끝났을 때, 그가 출근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손수 나서 젖을 물렸다. 




<깊게 물려라. 

유륜까지 앙> 





그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느라 허기가 졌었는지, 가슴 쪽으로 해오를 당기자 아기 새처럼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헥헥 댔다. 



내가 본 영상에 따르면, 아기는 그것보다 더 크게 입을 벌려야 했다.  (이 와중에도 돋보기 안경의 미드 와이프는 무작정 내 가슴을 아기 입에 넣으려고 했다. 워워) 나는 차분히 기다렸다가 아기의 입이 갓 나온 쉑쉑 버거를 한 입에 크게 물 수 있을 만큼 벌어졌을 때, 젖을 물렸다. (아.. 젖이라는 말을 되도록 안 쓰고 싶지만 대체어가 없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어떤 존재가 내 젖꼭지를 문다는 사실이, 거기에서 일용할 양식이 나온다는 사실이 약간 징그러웠는데, 막상 출산을 하고 나니 모든 것은 자연스러웠다. 딱 한 가지, 젖꼭지의 아픔만 빼고. 






4



깊게 물리면 안 아플 줄 알았다. 

아니었다. 

아팠다. 

좀 덜 아팠을 뿐.






분만실에서 샤워를 마친 뒤, 나는 휠체어를 타고 입원실로 옮겨졌다. 3일밤을 제대로 못 잔 상태,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간호사가 뭐라고 하는데 소리만 들리고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자고 싶었다. 


입원실은 1인실이었고, 오밤중이어서 그런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비행기 안에서 밤하늘을 내려다 보는 기분이었다. (서른 시간 정도 비행기를 탄 듯한 피곤함도 있었다) 


 내 컨디션을 파악했는지 코가 삐죽한 중동계의 미드 와이프가 아주 느린 속도로 (혹은 내 상태가 메롱이라 슬로우 모션처럼 들린 걸 수도)  '아기가 배가 고픈 것 같으니 수유를 해야겠다' 고 했다. 


너무 친절하고 자애로운 말투여서 거절할 수가 없었을 뿐더러, 나는 이미 배낭을 싸 짊어지고 모유 수유라는 등반에 오른 뒤였으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깊게 물려라. 유륜까지 앙>을 떠올리며 다시 시작된 모유 수유. 



호주 병원에는 수유 쿠션이 없었고 나는 베개를 이용했다. 모유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도 모른 채 비몽사몽, 그렇게 두 번의 모유 수유 시간이 지나갔다. 



미드 와이프는 새벽 5시쯤 또 한번 찾아왔다. 이쯤 되니 <모유수유 지옥>이라는 제목의 공포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내가 힘들면 분유를 주겠다고 했다. 

Please. 



간신히 답하고 잠에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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