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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in Lowland Jun 26. 2020

빨간 줄무늬 전차가 달리는 헤이그



헤이그 홀란드 스푸어 Hollands Spoor 역에 갓 도착했던 2013년 8월의 저녁. 깨끗하게 재정비된 지금과는 달리 우범지역 특유의 으스스한 느낌이 가득하던 역전에서, 나는 헤이그의 빨간-베이지 줄무늬 트램에 처음 올라탔다. 빨간 외관과 똑같이 빨간 가죽 시트로 된 트램. 그 이국적이고 아날로그적인 모양새에 나는 ‘여기가 유럽이구나’ 라는 감상에 젖었다. 보수성, 옛 것을 고집하는 완고함, 내가 어릴때 잠깐 다녀온 유럽은 그런  '트램 같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HTM tram no.16, photo by Min van der Plus, 2017





한국의 트램-노면 전차-은 개화기때 지어져 68년에 운행이 중지되었다. 때문에 내 또래의 한국인들에게 트램은 아날로그적인 향수를 준다. 마치 영국의 빈티지 자동차나 오래된 재봉틀, 타자기, 커다란 은판 카메라처럼 기계가 한창 발명되기 시작하는 산업혁명 시절의 물건 같은 느낌이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철길과 전기선, 그리고 종이 티켓을 체크하는 트램 직원, 댕댕거리는 종소리, 신문을 보는 중절모 신사 같은 것이 떠오른다.


네덜란드의 트램은 포르투갈 리스본의 트램처럼 본격적으로 관광객을 겨냥한 클래식한 외관은 아니다. 오히려 네덜란드의 트램은 도심 교통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현재진행형 대중교통 수단이다. 한국처럼 도심 재개발이 적극적으로 이루어 질 리 없는 네덜란드이다 보니, 길게 보면 거의 중세시절부터 이어져 온 도심의 골격을 유지하기 위해선 트램이 유리할 수 밖에 없다. 도시의 규모 자체가 한국보다 작기도 하거니와, 좁은 골목길을 환경 오염 없이 이리저리 누빌 수 있고, 최소 공간 대비 최대 승객을 태울 수 있기 때문에 트램은 유럽의 대도시에서 선호될 수 밖에 없는 교통 수단이다. 소득이 높은 동네의 경우 버스보다 오히려 트램을 선호한다고도 한다. (물론 대도시여야 트램의 수익률을 장담할 수 있기 때문에, 작은 도시들은 버스를 운행한다.)




네덜란드에 현재 트램을 운영하는 도시는 네 군데다.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위트레흐트, 그리고 헤이그. 이중 트램 디자인이 제일 예쁜 도시는 헤이그라고 단언한다. 헤이그의 트램 컴퍼니 HTM- Haagsche Tramweg-Maatschappij, 하테엠이라고 부른다-는 1887년에 설립되었는데 그 당시 처음 운행을 시작한 헤이그의 트램은 겨우 한마리의 말이 끌 수 있는 마차형 전차였다. 암스테르담보다 늦은 1904년 경에야 전기 전차가 비로소 헤이그 시내를 다니기 시작했다. 



말이 끄는 트램, 사진 출처 https://www.kusee.nl/paardentram/18-zh-gv.html




그 후 무수한 트램 디자인을 거쳐 현재 두 가지 모델의 트램이 운행중이다. 빨강/베이지 줄무늬가 예쁘게 그려진 트램과, 마치 벨로스터처럼 ‘현대적’으로 생긴 트램이다. 버스가 ‘목적지까지 운행하겠다’는 목표에 굉장히 충실한 반면, ‘주변 풍경에 조용히, 느리게 어우러지는’ 트램의 특성을 HTM도 잘 이용하고 있어서, 관광객용 빈티지 트램이나, 스타 셰프 피에르 빈드 Pierre Wind 가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트램 레스토랑같은 관광 상품을 운영중이다.



감성적으로는 빨강줄무늬 트램이 예쁘지만, 편의성으론 새로운 트램이 훨씬 좋다. 에어콘도 나오고, 스피커 음질도 좋고, 무엇보다도 계단이 없어서 휠체어나 유모차가 훨씬 더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6년동안 살던 동네를 지나던 노선 16번은 좁은 골목이 많아서, 폭이 넓은 현대적인 트램이 다닐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좀 아쉬웠지만, 보수적인 부잣집 동네를 가로지르는 트램 노선이라 그런지 오히려 그걸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이웃 사람들이 많았다. 그 동네 트램의 노선 번호는 원래 17번이었는데, 2016년인가 2017년 쯤에 노선 번호 16번으로 번호와 노선이 살짝 달라졌다. 집주인 아저씨가 ‘17번이 다니는 명예로운(?)동네에 살았는데 이제 16번 동네로 이미지가 섞이게 생겼다’며 아쉬워하던 것을 보기도 했다. 네덜란드 사람들도 동네 차별을 하는구나 싶어서, 살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Tram 16 under maintenance, photo by Min van der Plus, 2018 




나는 학생 치고는 트램을 자주 타는 편이었다. 대중교통이 비싼 네덜란드에서 웬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매일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트램 한번 타는 가격이 한국 돈으로 4천원-6천원 정도인데, 서울 지하철 기본 요금이 1300원 정도인걸 생각하면 손떨리는 가격이다. 하지만 워낙 짐을 많이 들고 다니기도 했고, 바람이 거세게 불거나 비가 올 때가 많아 이런저런 사고를 겪은 후에는 트램 반, 자전거 반 정도의 비율로 학교에 다녔다. 


개 중 트램과 연관된 사고도 한번 겪었다. 트램이 깔린 도로엔 트램 철로가 움푹 파여있다. 자전거 도로가 세상에서 제일 잘 정비된 네덜란드이지만, 좁은 길에선 자동차와 트램과 자전거가 한꺼번에 다녀야 할 때도 있다. 그 복잡한 길에 한창 적응할 무렵, 겨울이었나, 내 자전거 바퀴가 트램길에 끼어 순식간에 나뒹굴었던 적이 있다. 거짓말 안하고 도로 위를 다섯번 정도 데굴데굴 굴렀다. 길에 지나가던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달려와서 살아있는지(?)확인할 정도였다. 다행히 아무데도 다치지 않았고, 내 자전거도 약간 흠집이 난 것을 빼고 무사했지만, 그 이후로는 트램 트랙이 깔린 길에선 유독 긴장을 하게 되었다. 트램 길을 건널때마다 반드시 90도 각도로 바퀴를 놓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털이 바싹 선 고양이처럼 긴장한 채 자전거를 탔다. 







6년간 든 정 때문인지, 헤이그의 트램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트램을 타면 도심의 풍경을 느리게 감상할 수 있다. 덜커덩 거리는 트램 특유의 철길 소리와, 벽돌집과 나무와 자전거를 탄 인파가 연속되는 헤이그의 풍경이 어우러진다. 겨울의 불빛을 머금은 바우텐호프의 물결도, 아이들이 뛰어노는 젠헬더콰르티에의 라운드어바웃 분수도, 이민자들이 보따리 꾸러미를 가득 들고 있는 하그세마크트 시장도, 우거진 나무가 가득한 스헤베닝세웨그의 숲길도 구비구비 이어진 트램길을 따라 달린다. 로테르담으로 이사온 지금도 헤이그가 그리워지는 이유는 바로 트램이 내게 준 수많은 추억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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